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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섬세한 아이

by 보나


어린이를 기르고 그들과 함께 사는 사람, 어린이가 읽는 책을 쓰는 사람은 눈앞의 과제를 수습하는 일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 김지은 작가, <어린이는 멀리 간다> 중에서




어느 날 첫째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나도 스스로 머리 묶어 보고 싶어."

"머리? 엄마가 묶어줄게. 아직은 네가 스스로 안 묶어도 괜찮아. 그리고 넌 숱이 적어서 머리가 잘 풀어지지도 않으니 스스로 묶을 일이 별로 없을 거야."


이때가 첫째 아이 1학년이었다. 그 시절, 내가 알고 있는 1학년이 해야 할 발달 단계에 스스로 머리 묶기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사소한 것들은 나중에 어차피 크면 다 하게 될 텐데 뭘 지금부터 하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이모님이 계셔서 아이 머리를 아주 잘 묶어주셨고, 아이는 스스로 머리 묶을 일은 거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학년이 되었고 등굣길에 집 근처에 살고 있는 1학년 동생을 만났다.


"언니! 나 이제 머리 스스로 묶을 수 있다." 하며 자랑하고 지나가는 그 아이.


갑자기 그 말을 듣는데 1학년 때 우리 딸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 딸은 그때 했던 말을 잊은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이 짧은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아이들이 하는 말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구나.'


그 당시에도 학교에서 어떤 친구는 스스로 머리를 묶을 수 있다고 나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래?" 하며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머리 묶는 게 뭐 대수라고.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누구는 1학년인데 스스로 머리를 묶을 수 있고, 누구는 아직 하지 못한다는 게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 우산을 잘 펴고 야무지게 접을 수 있거나 샤워도 혼자 하는 등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많은 아이들이 있다. 물론 생일이 빠르니 발달이 빨라서 그런 것도 당연히 있다. 그렇지만 또래들 사이에서 '친구는 하고 나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건 아이의 자존감에 분명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첫째 딸은 어릴 적부터 약간 느린 편에 속했다. 섬세한 성향인 데다 대근육, 소근육이 좀 느렸다. 걸음마는 15개월에 시작했고, 어린이집에서는 소근육이 느리니 집에서 연습 좀 시켜달라고 까지 했다. 내가 어찌나 애가 타던지. 불안함과 걱정이 많은 초보 엄마는 느린 아이를 나도 모르게 채근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만의 속도로 자랐고, 학교 가기 전에는 다른 아이들만큼 야무지게는 아니지만 대충(?) 어느 정도는 본인의 것을 스스로 할 줄 알게 되었다.


나는 우리 아이만 놓고 봤을 때 이 정도면 만족했다. 조금은 느린 아이였으니까 건강하게 학교에 잘 들어가서 별문제 없이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데 자꾸 주변의 아이들이 보였다. 요즘 아이들은 빠르다던데 키가 우리 아이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건 물론이고 하는 행동들이 알차고 야무져 보였다. 뭐든 대충 하는 것 같고 그 대충 조차 힘들어하는 것 같은 우리 아이는 엄마인 나에게 아직 아가였다.


그런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보통의 1학년, 2학년과 같은 잣대를 들이댈 때도 있다. 너는 지금 1학년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2학년인데 이것도 못해? 하면서. 사실 뭐가 맞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데 중요한 건 조금은 천천히 크는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친구들과 같은 속도를 가지긴 어렵지 않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이런 첫째와는 달리 동생은 상대적으로 발달 속도가 언니에 비해 매우 빠른 편이다. 그래서 뭐든 그 나이 또래에 비해 쉽게 하고, 에너지가 남아 다른 친구들 도와주기까지 한다.


이 극과 극인 자매 사이에서 엄마인 나는 균형을 잡기가 많이 힘들다. 이건 아빠도 마찬가지 일거다. 첫째 아이가 가만히 있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일에 욕심을 부릴 때 아빠는 훈육을 하기 위해 강하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어찌 보면 군대식 훈육에 가깝기도 하다. 아빠의 방식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훈육을 하긴 하되 아이를 이해하는 게 선행되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아이의 발달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아빠를 보면 가끔 애가 탄다. 아빠에게는 부탁하고 싶다.


"아이를 먼저 이해하려고 하고 혼을 내면 좋겠어."


이해가 선행이 된 훈육과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하는 훈육은 그 시작점부터가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통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해를 기반으로 자신에게 하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아이도 다 알고 있을 거다.





<어린이는 멀리 간다>에서 김지은 작가는 말한다. 어린이를 기르는 사람은 눈앞의 과제를 수습하는 일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첫째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만 없애려 하면 안 되고 내면까지 봐야 한다는 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고 마음을 가진 사람이니까. 반복되는 훈육으로 인해 아무리 겉으로 행동이 사라진다고 한들, 마음이 정반대이거나 건강하지 않으면 결국 병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나도 나와 비슷한 이 아이를 이해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나랑 너무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려울 때도 많다. '내가 어렸을 때 저래서 힘들었던 거구나' 하며 이해가 될 때도 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할 때도 많다. 섬세와 섬세가 만나면 둘 다 와장창 깨지거나 엄마인 내가 깨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이를 섬세함을 잘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로 만들어야 한다. 그게 아이를 위한 길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이를 뼛속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는 엄마가 되기로 오늘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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