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 여름휴가
올해 여름휴가는 사실 계획된 게 없었습니다.
휴직을 하고 나니 쉼에 대한 여유가 많아져서 인지 어디를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워킹맘 일 때는 ‘여름휴가 때는 어디를 꼭 가봐야 해, 해외를 못 가면 제주도 라도 가야 해’라고 생각해서 꼭 미리 예약하고 회사에도 확실히 통보했었습니다.
일과 육아, 아이 교육, 남편, 나 자신을 챙기며 바쁘게 살다 보면 휴가만이 유일한 쉼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남들도 다 쉴 때 나도 쉬면 마음이 편하기도 합니다. 내 업무를 다른 이에게 부탁할 필요도 없고,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됩니다. 그렇지만 성수기 시즌이라 비수기보다 비싼 비용은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요. 그래도 이때만이 맘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니 휴가를 꼭 ‘제대로’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있다가 아이가 여름방학을 하고, 여름방학 때 시댁에 놀러 갔던 관성에 따라 무계획으로 울산에 내려갔습니다.
일주일 내내 시댁에 있기에는 우리 가족만의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아 가기 전 목요일 즈음에 급하게 리조트를 알아봤습니다. 역시 모두 예약이 꽉 찼고, 남은 방들은 금액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다가 당근마켓을 통해 그나마 저렴하게 숙박권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도 저에겐 처음이었는데, 거래를 하면서도 이게 사기당한 거면 어쩌지? 리조트에 갔는데 방이 없다고 하면 어쩌지? 하며 마음을 졸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사기는 아니었고, 무사히 리조트에 입실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 여름휴가는 운전을 하는 남편에게는 무척 고된 일정임이 분명했습니다. 서울-울산-속초(고성)-서울, 무척이나 먼 거리를 비효율적으로(?) 이동하는 동선이었거든요. 시댁인 울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운전을 하며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며 ‘역시 계획을 안 세우고 행동하니 고생스럽구나’ 후회했습니다. 리조트에 도착해서도 체크인이 늦어지는 바람에 워터파크도 가지 못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나 혼자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내가 괜히 가족들을 고생시킨 게 아닐까? 이렇게 피곤한 일정이 휴가가 맞나?
속초중앙시장에 들러서 저녁거리를 힘겹게 사고 숙소에 가서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10시가 좀 넘어 모두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7시부터 조식뷔페가 예약되어 있기 때문이었죠. 조식 황금시간대인 8:30은 예약이 꽉 차서 차선책으로 선택했습니다. 밤에 잠을 자며 또 걱정했어요.
남편과 아이들이 너무 피곤한 상태인데 아침 7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닐까? 아침에 조식을 취소하는 게 나을까? 온갖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7:00였습니다.
슬며시 첫째를 깨우고, 남편과 둘째를 깨워 조식뷔페로 갔습니다. 짜증 내지 않고 시리얼 먹으러 가자며 잘 일어나 준 아이들에게 고마웠어요. 남편에게도 요.
조금 늦게 갔지만 알차게 아침을 먹고 리조트를 한 바퀴 돌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못 간 워터파크를 일찍 갔더니 오히려 좋았습니다. 사람도 별로 없고 아이들은 마음이 여유롭고 배가 든든하니 평소보다 무척 신나게 놀았거든요. 우리 가족의 워터파크 시간은 보통 2시간이 최대인데 이 날은 4시간을 넘게 놀았으니 말 다했죠.
다음 코스는 계획이 없었는데 오락실에 가자는 첫째의
말에 “응, 그러자!” 하고 리조트 내 오락실로 향했습니다. 점심은 리조트 내에서 국수를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리조트 내의 명당인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마셨어요.
사실 마음속으로는 속초까지 왔으니 시내에 나가서 맛집도 찾아가고, 예쁜 카페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어요. 그렇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그때 그때맞춰서 할 수 있는 만큼 행동했어요. 카페에 가서도 예쁜 케이크를 가지고 장난을 치려는 아이들에게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도 주었어요.
그러고 나서 찍은 사진을 보니 인위적인 미소가 아닌 아이들의 진정한 행복과 웃음이 사진 속에 묻어있더라고요. 남편 역시도 약간은 마음을 여유롭게 내려놓은 채로 아이들의 장난에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미소가 보였고요.
이번 휴가는 인생은 역시 계획대로 되지 않고, 매 순간에 집중하면 바로 그것이 행복임을 다시 깨달은 기간이었습니다. 휴가뿐 아니라, 아이의 학습도 내가 계획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아이 자체에 집중해야겠습니다. 나 자신의 목표도 스케쥴러 대로 못한다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그때 그때 유연하게 이어 나가기만 하면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의도를 갖지 않는 것이다.
- 고명환, <고전이 답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