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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는 옷도 못 사나?

아이들 옷 정리를 하며

by 보나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졌다. 저녁 산책을 나가기 좋은 날씨다.

날씨에서 가을이 왔음이 느껴지면 아이들 옷 정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오랫동안 쌓아온 경험에서 나온 걸까?




여름옷들은 몇 벌만 남기고 상자에 넣고 가을에 입을 옷을 꺼내어 정리를 했다. 문득, 아이들이 부쩍 컸음을 느꼈다. 첫째는 날씬한 아이라 제 나이보다 한 치수 적은 옷을 사도 알맞게 맞았었다. 그래서 제 치수에 맞는 옷을 사서 예쁘게 입고 다음 해가 되면 한번 더 입고는 했다. 그랬는데 올해도 맞을 거라 생각했던 첫째의 옷이 생각보다 작게 느껴졌다. 올해 입기 위해 작년에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던 옷들은 다 동생의 서랍장으로 가야 한다. 동생과는 세 살 터울이 나서 바로 입지는 못하지만 동생 서랍에 보관을 해놓았다가 내년에 입히면 될 것 같다.


'첫째가 언제 이렇게 많이 컸을까?'


매일 옆에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옷 정리를 하다 보니 마음에 확 와닿는다. 대부분의 옷들은 다 동생 서랍장으로 들어가고 언니의 옷은 새로 사야 한다. 아동복 앱을 열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옷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요즘에는 산리오 캐릭터에 푹 빠져 있어서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옷 위주로 고르고, 몇 개는 엄마 취향의 옷도 담았다.


'네가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엄마가 도전해 본다. 잘 입어주렴'


언니의 옷만 담다가는 동생이 울면서 나에게 말할 게 분명했다.


"엄마는 왜 맨날 언니 옷만 새로 사주고 내 옷은 언니가 입던 것만 줘? 나도 공주 드레스 사줘."


둘째는 공주 드레스를 좋아한다. 웬만하면 티와 바지를 입는 법이 없고 항상 치마로 된 옷만 입으려고 한다. 둘째의 취향에 적당해 보이는 옷들로 몇 벌 골라서 추가로 담았다. 몇 개 안 담았는데도 10만 원이 훌쩍 넘는다. 내 옷은 전혀 사지 않았고 살 생각도 없다. 아이들의 옷을 사면서 대리 만족을 해 본다.


그래도 휴직한 상태라 아이들 옷 정리도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워킹맘이었다면 계절이 다가온 건 느꼈지만 '옷 정리 해야 하는데..' 하며 마음만 있고 허송세월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옷 정리 하나 하는 게 왜 그렇게 귀찮고 힘들던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마음만 한 가득이고 행동으로 이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미루고 또 미루는 게 내 일이었다.




휴직기간을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보내기 위해 마이너스 통장 대출까지 당겨서 받아놨지만 나를 위해 무언가를 소비하는 게 계속 망설여진다. 매일 글을 쓰기 위해 스타벅스에 가는 비용, 가끔 아이들 픽업을 하고 남는 시간을 위해 가는 카페에서 쓰는 비용, 식재료를 사는 비용, 아이들과 관련된 물건 구입 비용 등. 주로 내가 사용하는 돈은 카페와 아이들 관련된 비용이 전부다. 이 와중에 가을이 왔다고 해서 내 옷까지 사는 건 아무래도 사치인 것 같다.


일을 하다가 잠시 백수가 됐다. 원래 일을 하던 사람이라 그런 건지, 맞벌이 부부라도 서로의 수입을 나누어서 관리해서 인지 몰라도 남편의 돈을 쓴다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남편 카드를 쓰면서도 때때로 눈치가 보인다. 휴직 기간 동안 최대한 아끼고 열심히 글을 쓰겠다 다짐했다.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소비를 하지 않는 게 분명한데도 우리 가정의 돈은 외벌이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외벌이로 살았다면 그 씀씀이에 맞춰서 학원도 선택하고, 외식도 줄였을 거고, 주말에 놀러 가는 일도 덜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맞벌이로 살면서 학원도 고민 없이 많이 보냈고 몸이 힘들 때 외식도 자주 했으며 주말에는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하에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보니 돈은 벌지만 남는 게 얼만큼 인지, 남기는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외벌이 가정이 되어 버리니 턱 없이 부족한 게 돈이다. 나라도 줄여야 한다. 나에게 쓰는 돈이라도 줄여야 이 가정을 유지할 수 있다.


백수가 되니 내 옷도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대신 아이들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내 한 달 월급과 맞바꾸자면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다.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지만 아이들의 9세, 6세는 지금 이 시절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과 함께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듣는 시간, 아이들과 함께 등, 하교하는 시간, 조잘조잘 아이들의 말소리를 듣는 시간, 같이 춤을 추는 시간, 같이 요리를 하는 시간, 놀이터에 가서 노는 시간 등. 너희들이 원하는 너희들만의 시간에 내가 들어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7, 8월 두 달간 온전히 아이들과 함께 맞이하는 여름을 보냈다면, 이제는 너희들과 온전히 함께하는 가을을 맞이할 테다.


내 옷 그까이 꺼 뭐가 그리 중요하겠나, 너희들이 행복하면 됐지!


부모가 말을 귀담아 주고, 격한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해 주면, 아이들은 자기들의 견해와 감정이 평가를 받고, 자신들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존중받는다는 느낌은 아이들에게 자존심을 세워준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게 되면, 아이들은 사건과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 좀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 하임 G. 기너트의 <부모와 아이 사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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