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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프면

엄마 반성문

by 보나

몸이 아파오면 마음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체력의 아픔은 마음의 상처들을 건드리기 시작해서 내면의 깊은 곳까지 잠식해 버린다.




요 며칠간 감기몸살로 인해 아팠다. 목이 간지럽고 따갑기도 해서 혹시 몰라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요즘 코로나는 열도 많이 안 나고 목 아파서 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코로나 검사 비용이 35000원인데 할지 말지는 본인의 자유 라고 하셨다. 어차피 코로나 약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감기약과 같은 약을 처방해 주신다면서. 그래서 "검사는 안 할게요." 하고 약국에 가서 자가키트를 샀다. 떨리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검사를 해봤더니 뙇! 몇 초도 안되어 두 줄이 뜨는 게 아닌가. 이건 빼박 코로나가 분명하다.




아니, 이 얼마만의 코로나 인가. 코로나가 한창 유행하던 몇 년 전, 나는 물론 코로나에 걸렸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안 걸린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두 번이나 걸렸었다. 근데 그때 코로나 걸렸을 때와 증상이 조금 달랐다. 그때는 목이 아픈 정도가 더 오래가고 근육통과 열이 심했는데 이번에는 목이 간지러운 증상이 더 오래가고 가래가 더 많이 끼며 몸에 힘이 더 없었다. 열은 37.1도 정도를 유지했고 근육통은 생각만큼 심하지 않았으나, 몸이 계속 처졌다. 몸이 가라앉기 시작하니 내 정신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주말 중 하루는 거의 누워 있었고 아이들은 동생과 남편의 도움을 받아 케어가 가능했다.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더 고마운 건 남편이 주말 내내 나를 위해 요리를 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 말한다. 직접 말하는 건 아니고 내가 물어봐야 말을 하는 경상도 남자이긴 하지만.


"요리하는 게 재미있어 보이네?"

"먹고살려면 해야지."

"내가 한 요리가 그렇게 맛이 없어서 스스로 하는 거야?"

"........" ^^;;


결론은 내 요리가 맛이 없어서 스스로 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요리하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 사람이 요리를 진심 좋아하는구나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르고 정돈된 칼질, 적당한 양념, 적당한 물양 맞추기 등. 요리가 생각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라 뼛 속까지 공대생 남편과 잘 맞는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공대생 남편의 삼시 세끼 정성스러운 요리를 먹으며 약을 챙겨 먹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몸에는 계속 힘이 없었다. 그럴수록 자꾸 내 생각은 부정적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이런 건가. 내 의지와는 다르게 안 좋은 생각만 자꾸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남편과 싸우지 않았을 아이 양육과 관련된 의견에 대해 충돌이 있었다.


"애가 넘어져서 울면 마음을 먼저 달래준 다음에 훈육을 해야지, 무조건 일어나라고만 하면 어떻게 해!"


"아니야, 운다고 달래주면 고통에 대한 역치가 낮아져서 앞으로도 계속 울 거야.“


"아이들은 아직 성장하고 있는데 천천히 달라질 거야."

"지금부터 제대로 훈육하지 않으면 안 달라져."


남편과 나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론이 없이 화만 내다가 끝나 버린다.


육아전문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부부간의 양육관이 일치해야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다고 하던데, 그들의 의견이 맞다면 우리 집은 글렀다 싶었다. 우리 집만 이상한 걸까? 아니면 다른 집도 이럴까? TV에 나오는 양육관이 일치하는 부부들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내가 볼 때 참 신기할 따름이다.


생각이 너무 극단적인 데 까지 이르자, 이제 그만해야 하는 건 알았지만 이런 나를 다잡을 힘조차 없었다.


병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아니면 원래 내가 이런 사람인데 병으로 인해 내면의 약함이 드러난 걸까?


아마 후자일 거다. 아프다고 해서 사람이 한순간에 변하지는 않을 거 같으니 말이다. 나는 원래 나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고통의 역치가 낮은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사람마다 고통의 역치가 다 다를 텐데 그걸 일반화하면 안 되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고통의 역치가 낮아서 사회생활 하기 힘들었던 건 사실이다. 다른 사람보다 마음이 여리고, 말에 대한 상처를 잘 받고, 그럴수록 극복하려 하지 않고 동굴 속에 들어가려 했다. 회사에서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면 다음부터는 그 사람을 아예 보지 않기로 다짐하기도 했다.


지금 나는 아픔으로 인해 내면의 나약함을 다시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이게 이렇게 까지 밑바닥을 드러낼 일인가. 아이들에게도 며칠 동안 참아야지 했던 말들을 다시 내뱉고 있다. 첫째가 느린 걸 기다려 줘야지 해놓고서는 오늘 아침에도 "제발 빨리 옷 좀 입자. 밥 좀 빨리 먹어. 너 굼벵이야?"라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인내심이 0보다 더 한 마이너스 수준까지 내려간 게 틀림없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혼자라면 혼자 누워서 쉬면서 잠을 자고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엄마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아이들을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 남편과도 마주치지 않을 수도 없다. 나의 힘듦을 있는 그대로 그들과 공유해야 한다.


그래서 하루 종일 집에서 쉬기로 결정했던 어제의 나와는 달라지기 위해 오늘은 힘든 몸을 이끌고 역시 스타벅스로 왔다. 힘든 몸이지만 자리에 앉으니 글이 써진다. 이렇게 사람은 역시 힘들어도 밖으로 나가야 하고 움직여야 하나보다. 특히 몸이 아플 때는 더더욱 혼자 방안에만 있지 말고 나와야 조금이라도 활력을 얻는 사람이 바로 나다.


엄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가족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 미안함이 크다.


평소 같았으면 주말 내내 내 끼니를 정성껏 챙겨 준 남편에게도 그렇게 뾰족하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고맙다는 말을 끝까지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이들에게도 웃으며 힘이 넘치게 즐겁게 말을 건넬 수 있었을 텐데, 첫째를 나무라는 게 아니라 힘이 되는 말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이들에게 더 맛있는 음식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내 마음은 온통 반성과 후회로 가득하다.


병이 내 몸을 잠식하게 하지 말고, 내 몸을 움직여서 병들이 스스로 나가버리게 해 보자.

그것만이 병이 내 정신을 지배하지 않고, 내가 정신력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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