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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레인튜너 May 04. 2022

정도만 걷는 게 잘하는 것일까

인생, 정도, 사도, 패도, 신독, 삼국지, 조조, 유비, 정주영

영어로 'It depends'라고 말하면 우리말로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의미다.




사람들에게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인물 중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물으면 대체로 유비(劉備)를 꼽는다. 아마 유비하면 인자하고 덕(德)이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소설에서 유비는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또한 의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아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 유선을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구해왔을 때 아들을 패대기치면서 조자룡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은 극적이기까지 하다.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내 큰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
- 황석영,『삼국지 4』, 창작과비평사, 127쪽

"이 못난 아이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장수 하나를 잃을 뻔했구나!"
- 장정일 『삼국지 5』, 김영사, 26쪽


대의를 위해서 가정사를 뒤로 할 줄 아는 사람, 아마 그때도 이런 사람이 존경을 받았나 보다. 이 모습에 조자룡은 간과 뇌가 땅에 쏟아질 정도로 충성해도 유비의 은혜를 갚을 길 없다고 답한다. 이 모습에 당시 사람들은 깊게 감명을 받았다.


유비는 조조, 손권에 비해 가장 미약했다.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빼앗고 뺏기는 시대, 인(仁)이 사라지고 도(道)가 무너진 세태에서도 절대로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았다. 책사와 참모들이 무력이나 권모술수를 쓰라고 재촉해도 길이 아니면 가지 않은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 같다.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가 답했다.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안연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다시 물었다. 공자가 부연 설명을 한다.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동(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거라.

-  김원중, 『논어』, 글항아리, 216쪽 -




아직도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은 당시 가장 큰 제국을 이룬 조조(曺操)다. 소설에서 허소(許劭)가 조조를 치세에는 능신, 난세에는 간웅으로 평했다. 조조는 상황에 따라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갔다. 인격이 고매한 척하지도 않았다. 욕망을 숨기며 안 그런 척하지도 않았다. 야욕을 숨기지도 않았다. 완벽한 듯 보이고 싶을 법한데도 치부를 숨기려고 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분명한 건 조조 한 사람의 존재감만으로도 소인배들이 함부로 준동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난세에 조조 자신이 병권을 쥐고 있지 않았다면 더 혼란스러웠을 거라는 걸 황제 앞에서도 당당히 밝힐 정도였으니 말이다.


경략가로서 조조는 유비나 손권이 감히 따를 수 없었다. 당시 인재들은 조조 밑으로 몰려들었다. 위나라는 촉나라나 오나라와 비교 수 없을 정도로 대국(大國)이었다. 정도를 가는 것만으로 다스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때로는 권모술수도 써야 하고 백성을 속이기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성이나 세상을 기만하거나 기망한 건 아니었다. 통치술의 한 방편으로 사용했다고 두둔하고 싶다.


조조를 간신으로 묘사하지만 사도(邪道)를 추구한 비루한 인물은 아니다. 졸렬한 인격의 사람도 아니다. 조조는 인의(仁義)를 저버린 소인배를 경멸했다. 세상을 태평성대로 만들기 위해 나름 적절하게 처신했다. 명분이 필요할 때와 실리를 취해야 할 때를 너무 잘 알고 대처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유능한 CEO라 할 수 있다.




소시민으로 살았다. 비록 권력, 돈, 명예는 없어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녀들의 아버지로, 기성세대로 나름 올곧게, 반듯하게 살았다고 자부했다. 한 30년 이상 그렇게 살아온 지난날을 보니, 과연 잘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동안 나만의 '정신 승리'에 빠져 자기 정당화만 하고 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인생을 살면서 주관도 없고 원칙도 없이 살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선비처럼 신독(愼獨)을 철저하게 실천하고 산 건 아니다. 물질만능 시대다. 그래도 시류에 맞춰 사는 건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살다 보니 알게 됐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데...  


1988년 5공 청문회장에 불려 간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한 말이 떠오른다.


나는 시류에 따라 삽니다.


'그때그때 달라요'가 어찌보면 인생의 지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젊은 시절 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되돌아보니 내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게 시류에 따라 살았는데 왜 정신 승리에 만족하고 살았는지 후회한다.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말이 새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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