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인 듯 친구 아닌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연락 온 진숙이랑 청담 맛집 코코 루에서 디너 세트를 먹고 지하철을 탔다. 나는 봉천동에 진숙이는 서울대입구에 살아 함께 돌아가는 길, 왠지 모를 어색함이 감돈다. 세트에 포함된 화이트 와인 한 잔 때문인지, 숨 막히는 금요일 밤 지옥철에서 약간의 취기를 느껴야 했다. 밖은 시원한 데 지옥철 안은 막차를 놓치기 싫은 사람들의 온도로 후텁지근했다. 좁아터진 지옥철 안에서 콩나물시루 가 된 기분이 괜히 무겁고 다리도 아팠다.
은경: "어? 못 보던 가방이네? 올 요즘 이거 많이 메고 다니더라? 샀어?"
진숙: "사긴 뭘 사. 내가 이런 거 사는 거 봤어?"
은경: "그럼 이건 뭐야, 안 샀는 데 메고 있냐? 훔쳤어?"
진숙: "받았어."
은경: "받았다고?"
진숙: "어, 선.물.받.았.다.고"
은경: "오, 좋겠다? 누구한테?."
진숙: "누구겠어. 남친이지."
은경: "뭐어? 남자 친구? 헐."
진숙: "어. 남자 친구."
은경: "올. 남친 생겼어?"
진숙: "뭔 소리야. 3주년 돼가고 있는 남자 친구입니다."
은경: "아, 그 사람?"
진숙: "남자 친구가 뭐 그냥 이쁘다고 사 왔더라고. 내가 말 안 해도 종종 사와."
은경: "그래. 그때 무슨 축제쯤에 봤으니까 3년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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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경: "1,3,5,7,9 래."
진숙: "? 응? 그게 뭐야?"
은경: "남자 친구 고비 오는 관문. 1년에서 3년 되면 남자 친구랑 오는 관문, 3년에서 5년이면 결혼하고 오는 관문."
진숙: "참나. 관문? 야, 인생이 관문이야. 우리 인생 자체가."
은경: "어, 그래. 너 저번에 페북에 우울하다 어쩌다 올려서 난 또 헤어진 줄 알았지."
진숙: "무슨 우울하다고만 하면 사람들은 헤어진 줄 알더라? 꼭 애인 없는 애들이 남들 언제 헤어지나 도끼눈 뜨고 쳐다보고 있지. 사람들 웃긴다니까. 기분 안 좋다고 올리기만 하면, 남친이랑 싸웠어? 이런다니까. 남 안되길 기다리고 있어. 아님 뭐든 남친이랑 연결시키는 걸 보면 뇌가 하나 인가 봐. 웃겼다니까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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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 "야, 야야, 내가 귀여운 거 보여줄까? 이거 봐봐, 이 인형 욜라 귀엽지. 완전 득템이라니까."
은경: "어디 봐. 오~, 근데 야, 너 이 옷 좀 버려라. 아직도 입고 다니냐? 쩐다. 진짜."
진숙: "어 좀 오래되긴 했지. 뭐 어때. 나 이거 헤질 때까지 입을 건데? 이쁘잖아."
은경: "사골이냐. 진짜 구멍 났겠다. 크크크."
진숙: "야, 자리 났다. 너 앉아."
은경: "아니야. 너 앉아. 너 짐도 많은 데."
진숙: "에이, 너 앉아. 나 괜찮아."
은경: "나도 서 있을 래."
두 사람은 이 내 말없이 각자 휴대폰만 보다가 또 아쉽다는 듯, 간간히 서로를 비꼬는 말을 했다. 어느덧 크고 나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들로 서로를 불편하게 했다. 누가누가 더 재수 없게 구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게 어른이라는 걸까?
어차피 마음속으로는 "얘는 나랑 코드가 안 맞아."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웃으면서 밥을 먹으러 나간다. 딱히 다른 약속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어서, 금요일 저녁 괜히 집에 있으면 왠지 나만 혼자된 기분이다. 페북만 봐도 다들 술 먹으러 나가있는 데. 그렇다고 또 막상 만나고 나면 은근히 불편하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서 불편함을 대놓고 펼치지 못하는 두 사람이다.
은경이는 은근히 자랑만 늘어놓는 친구의 말투가 영 거슬렸다. 뭐 선물 받고, 데이트 가고, 어디 가서 뭐 먹고, 뭐 했다, 뭐 샀다 죄 이런 말들만 줄줄 늘어놓는 친구의 정신 상태도 의심스럽다. 도대체 남자 친구 없었으면 세상살이 어떻게 했을까. 남친 생기면 코 뻬기도 연락 안 하던 년이 웬일로 밥을 산다고 나오라고 하나 했다. 고까워서 들어줄 마음도 없었지만 진짜 입만 열면 "어우, 오빠가~"로 시작한다. 아무튼 또 하나 인생에서 친구 목록을 지워 내려간다.
점점 친구라는 존재가 부담스러워지는 이유는 뭘까. 내가 속이 좁은 건가. 사람들은 점점 개방되어 가는 데 진짜 속 마음을 털어놓는 존재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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