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레멘타인 Nov 23. 2016

(1분 소설) 비밀

클레멘타인 1분소설

Dear 패니.


사랑하는 패니.

너무 늦은 건 아닌지 걱정이 돼. 이 편지를 쓰기까지 우린 너무 멀리 돌아왔어. 하지만 결국 나는 오늘에야 이 지독한 운명에 굴복하기로 했어. 아, 좀 더 빨리 널 찾아야 했는데. 미안해. 그러나 나는 해야만 했어. 비록 죽음의 사다리의 끝에 매달린다 해도.


우리의 평온한 나날을 더러운 인연으로 바꾸어 버린 그날 밤.


나는 언제나 다름없이 너에게 향하고 있었지. 나는 15번가 골목에 위치한 작은 프로방스 카페에서 함께 마시던 자스민 차 한잔과 머랭 쿠키를 시켜두고 널 기다리고 있었어. 너는 항상 15분이 늦었지. 나는 오히려 그 시간이 즐거웠어. 멀리서 오는 니 모습을 바라보는 건 꽤나 아름다운 풍경이거든. 그리고 넌 실제로 늘 나타나 주었고.


하지만 패니. 그날은 달랐어.

뭐랄까. 모르겠어.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어. 나는 말이야. 복잡해졌어. 인간은 짧은 시간안에 괴물로 변하기도 하잖아. 어쩌면 내가 그런 걸까.


그날따라 새끼손가락이 자꾸 아려와. 욱신 욱신 거렸지. 이 세상을 호령하던 누군가도 이유 없는 고통에 빠지면 인간은 정말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리지. 죽음이 곁에서 거친 숨을 내쉰다는 걸 느끼면 우리는 태초의 생물이 되어버려. 갓 나온 아기처럼 원하지 않는 어떤 것에 휘말려 버린 거지. 감당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내던져지고, 두렵고, 낯설고, 고통에 찬 울음이 내면에 가득가득 쌓여버려. 그때 드는 생각은 단 하나야.


살고 싶다.


오. 이런 이야기는 너에게 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사랑하는 패니. 그러나 나는 널 이해시켜야만 하는 날이 왔다는 걸 알아. 그날 난 아팠어. 아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욕망 따위는 나 자신의 고통보다는 전혀 쓸모없다는 걸 깨닫게 되지. 그리고 아프게 하는 그 어떤 것을  어떤 식으로든 없애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떠오르는 건 니 목소리. 니 숨결. 그러나 다시 고통에 찬 나의 존재.


그래.

이 모든 상황의 전조처럼. 전날 밤 나는 새끼손가락이 짓이겨지는 고통에 펑펑 울었다니까. 어른이 되면 아프다고 우는 건 이상한 일이야 안 그래? 어른이 되면 해야 하는 일만큼 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늘어나는 거니까. 우리 엄마는 어릴 때도 울기만 하면, "울지 마! 뚝해!" 이런 말을 하곤 했어. 우는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 그게 피로 맺어진 부모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말이야.


칼날처럼 아린 고통에 희뿌연 밤이 오면, 무기력한 세상은 하나의 구멍이 되지. 깊은 홀 속을 들여다보고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그 순간 곁에 패니, 니가 없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면 나는 죽을 만큼 아파. 그러나 꿈속에서 꿈이라고 외쳐봤자 꿈에서 깰 수없어. 우리는 그렇게 현실에서나 꿈에서나 어디에서도 탈출할 수 없지. 등신 같은 인간들만이 지금의 현실이 바뀔 거라고 생각해. 패니. 세상을 바꾸는 무언가는 따로 있어. 그게 뭔지는 몰라도. 나는 아닌 거야.


하지만 꿈에서 만큼은 달랐어. 나는 좀 더 결단력이 있고 강했지.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지독하게 앞으로 나가는 신념에 가득한 사람. 황량한 사막을 내달리는 저 검은 말처럼 거친 숨을 몰아 나는 제 멋대로 달려갔어. 그렇게 폭주하듯 꿈속에서 욱신 거리는 새끼손가락을 가차 없이 잘라내 버렸어.


그렇게 네 손가락이 덜렁덜렁 제 멋대로 춤을 추더군. 하나가 없어진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수많은 생명들의 비명도 긴 어둠의 축제에는 끼지 못 해.  그러나 빛이 떠오르는 순간 수많은 점들을 잃어버린 걸 후회하지. 연약해진 우리는 힘을 다 쓸 수 없어. 실제로는 아무도 모르겠지. 패니. 모두가 연결된 거야. 마치 너와 나처럼.


하지만 생각해봐. 패니 우습게도 새끼손가락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잖아. 귓구멍이나 후비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의 증표로 사용하지. 약속 따위 누가 지키겠어. 약속이라는 건 천천히 부서지는 낡은 건물과 같아. 부스러지고 금이 가고 언젠가는 기억에서 지워지겠지. 혼자서 아무리 지키고 있어봤자라니까. 나는 그걸 뼈저리게 느꼈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고루함이야.


오 패니. 나의 패니. 내가 너무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는 나의 angel.

난 4개가 된 불균형한 손을 천천히 바라봤지. 괴물로 변한 내 일부를 보면서 나는 기뻤어.


'거봐. 잘라내길 잘 했지? 아무짝에 쓸 데없이 달려있었다니까. 거기다 아프기까지 했으니 정말 지루한 일상이야.'


나는 스스로에게 칭찬을 하며 키스를 퍼부었지.


제길. 패니. 사랑이라는 것도 그런 걸까.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아파지는 거 말이야. 네가 나타나지 않았던 그날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이 되어버리는 거지. 잔뜩 만들어 놓은 제품을 아무도 원치 않는 그런 무의미함. 소중한 음식을 차려도 거들떠도 안보는 그런 시간들. 주고 또 주어도 곁에 아무도 없는 그런 텅 빈 시간들 말이야. 오히려 잘라내 버리고 불안함이 사라지는 그 어떤 상태 말이야.


사랑은 말이야.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 그러나 동시에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지. 웃기지 않아?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라니. 그래. 나는 두려웠던 거야.


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나를 깊은 곳으로 이끌었어. 불 꺼진 지하실로 천천히 내려가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려. 먼지 쌓인 서랍을 모조리 꺼내고 낡은 상자를 뒤집었지 언제 있었는지 모를 무언가의 부속품들. 조각들. 짝이 없는 어떤 것들이 서랍 안에서 나뒹굴고 있었어. 그리고 빛을 보지 못 해 그저 그렇게 죽은 채로 있었지.


아. 패니. 왜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걸까. 분명 어딘가에 필요한 조각들인데.. 왜 그토록 잔인하게 잊히는 거지. 아무도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야.


그렇게 너는 오지 않았어. 마지막 인사도 없었지. 나는 그렇게 잔인한 함정 속에 빠진 가련한 한 마리 나방이 되어버렸어. 그리고 영영 다시는 날지 못했지. 나는 혼란스러웠어. 그리고 혹시나 너가 약속을 잊은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너의 집을 찾아간 거야. 하지만 패니. 난 그러지 말아야 했어.


세상의 진실에 다가서는 순간 모든 악의 기운에 한 발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사람은 저 마다 지독하게 비밀스러운 이야기 하나쯤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해.





패니.

그리운 나의 패니.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나의 angel. 하지만 이제 온전히 내 기억에서 나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나의 패니. 인간이 괴물이 되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걸릴까. 그 괴물은 어디서 나타나는 걸까. 어쩌면 내 안의 진짜 나였던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1분소설) 당신의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