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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Aug 11. 2017

48. 접힌 밤

#바다를사랑한클레멘타인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떨어지는 조명에 당신 얼굴이 흔들린다. 밤을 가로로 접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오늘만큼은 작은 술잔에 마음을 게워낸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일본풍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른다.


당신의 가난한 손을 따라 술잔은 비워지고 또 비워진다. 나는 이따금, '그랬구나, 그렇구나, 저런'과 같이 의미 없는 말들로 내가 여기에 존재함을, '우리'라는 단어를 써도 미안하지 않을 만큼 입을 벌려 맞장구를 친다. 당신은 작은 잔을 눈 앞에 들어 올려 떨어지는 조명에 이리저리 돌려본다. 멀뚱히 보고 있던 나는 당신의 손 끝을 따라 술잔 너머에 당신을 바라본다. 붉어진 당신의 얼굴만큼 물들어 버리는 기분을 어쩌지 못한다. 이가 맞지 않는 서랍처럼 덜커덩 거리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하릴없이 술잔을 채워라 보챈다. 이왕이면 가득히, 주르르 흘러넘칠 때까지 채워달라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냥 좋았다. 그리고 모든 게 애처로웠다. 그래서 마음이 쓰였다. 그건 사랑은 아니야. 그냥 마음이 쓰이는 거야. 그래서 한 번도 사랑이라는 단어에 당신을 끼워 맞춰 본 적이 없다. 그냥 스치는 일상의 풍경처럼 당신 옆에서 이야기를 들었고, 술을 마셨고, 가끔 의미 없는 맞장구를 치며 뾰족한 인연의 끝 언저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언제나 텅 빈 술잔이 있었다. 게워낸 마음을 가득 담아 꿀꺽꿀꺽 도로 삼켜야만 하는 술잔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밤은 그렇게 세모가 되었다가 다시 펼쳐졌다가 다시 네모가 되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날들로 반복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도 완성하지 못 한 채 '우리'로 남았다.


가끔 당신이 술에 취해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럴 때면 당신 손에는 항상, 이야기가 담긴 술이 잔뜩 들려있었고, 나는 익숙한 듯 작은 밥상을 펼쳤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무언가 있지 않으면 '우리'가 될 수 없으니 나는 무엇이든 준비해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 사이를 막아서고, 우리 사이를 연결하고, 우리를 완성했다. 술잔을 따라 입술을 적시던 진한 마음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와 아리다. 밤은 참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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