ㅌ. 타성에 대하여
나무는 서서 잔다.
대신 그 뿌리가 깊어서 넘어질 일이 없다.
강릉으로 내려온 후 한 번도 혼자 서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서 있기 싫었다. 그냥 눕고 싶었다. 내 삶은 언제나 피곤하고 불안해서 어딘가 기댈만한 받침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은 한번 품기 시작하자 무섭게 커지더니 결국 나를 영영 서지 못 하게 했다.
내가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지만, 막상 그런 삶은 괴로웠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어딘가 잘 못 되었다고 이건 아니라고
나의 무의식이 매일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안락함에서 중독된 상태, 내가 서 있는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버텼다.
버텼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지금 돌이켜 보면 헤어짐은 내게 오히려 잘된 일이다.
사랑이 깨어진 건 크나큰 슬픔이지만 나라는 인간 자체를 놓고 보면, 그러니까 내 한 생애를 놓고 보면, 하나의 축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상대가 못났거나 상대가 괴롭거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 바로 나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나는 굉장히 게으르고 그 게으름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걸로 인해 돌아오는 문제점들을 남에게 해결하라고 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건 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환경 때문이라고 탓했고, 비난과 눈물 그리고 우울증에 걸리는 일 밖에 할 줄 몰랐다.
그렇게 비난의 쿠션이 필요했던 나는 그저 어리광만 부리는 아이 같았다. 시간은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았고 나의 젊음은 어디론가 통째로 사라졌다. 지금은 사랑했다는 사실과 그 흔적들만 남아 있다. 나는 강릉으로 내려온 이후로 성장이 멈춰있었다.
이별은 시간이 만들어 놓은 덫이지만 발목이 잘린 후에야 나는 정글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은 전쟁이 끝난 마을의 폐허처럼 모든 것이 텅 비고 공허한 기분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들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절절하게 깨달았다.
아주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사랑도 사랑답게 하지 못하고 나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며 살았다는 것을.
환부 없는 고통에 매일 시달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를 감싸주던 빛이 사라지고 나니 내게 남은 건은 아주 단순했다.
글 쓰는 일과 책을 읽는 일,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
나는 그것들로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인간이란 모든 불행을 견디고 나면 행복으로 나아가려는 반작용이 있기 마련,
방 배치를 바꾸고 책상 세 개를 방에 들여왔다. 컴퓨터를 새로 장만하고 책을 하나 둘 사보기 시작했다.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정말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나는 매일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정말 절실했던 게 있었던가?
앞으로 계속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 적이 있는가?
나는 제대로 사랑하고 살았는가?
마음을 진실하게 전달한 적이 있는가?
타성에 젖는 순간 우리는 나약해진다.
자꾸만 어딘가 기대려고 하고 그걸 보호막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나는 원래 이래. 나는 더 이상 안 돼. 그건 무리야.
고통 속에 희망이 있고, 절망의 끝에 길이 있듯이 무언가 다 잃어 본 사람은 오히려 잃기 전보다 대범해진다.
생의 마지막에 정말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어떤 생각일까.
타성에 젖는다는 건 자신에게 쓴 불행한 편지를 받는 일이다.
누구라도 제 자신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그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만 있다면 , 그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위대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사랑하며 가치 있는 삶을 살자.
벼랑 끝에 서더라도 보고 싶은 사람을 손으로 만지는 일, 사랑하는 사람을 어렵게 사랑하지 않는 일, 오해에 빠졌다가도 사랑으로 곧장 돌아오는 일, 비 오는 마음을 처마 끝에 숨기지 않는 일.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온몸으로 뛰어넘어 한 생애를 사랑하는 일을 할 것이다.
조급하지 않게. 끝까지. 두 발로 딴딴하게 서서.
@클레멘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