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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Oct 03. 2018

첫날

2018.10.03 새벽


내가 기억하기 이전의 당신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나와 당신이 처음 마주친 날은 지하철을 내리면 무조건 뛰었던 구로역 1번 출구였지. 그 당시 나는 회사 동료들에게 뒤에서 '웍!'하며 놀라게 하는 장난에 빠져 있었어.


팁을 주자면, 이건 출근 시간에 해야 꿀잼이야. 왜냐면 그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출근, 출근, 지각, 지각 이런 멍청한 생각밖에 없거든. 영혼은 여전히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데 발만 착착 회사로 향하는 거야.

'역을 빠져나가면 횡단보도가 녹색불이면 좋겠다.' 이런 잔기침 같은 생각 따위나 하면서 말이지.

그래서 꽤나 잘 먹혀. 너무 놀라 횡단 보도에 주저 앉은 직원도 있었지.


집, 회사, 집, 회사 낡은 괘종시계의 추처럼 꾸역꾸역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였어. 그리고 퇴근 후면 뭐가 그리도 부족했던지 늘지도 않는 영어 회화를 끊거나 비염 걸릴 수영을 하러 다닌다거나 하는 등 자기계발에 열중하곤 했어.


서로 말은 안 하지만 아침에 만나는 사람들도 비슷하고 회사로 향하는 풍경도 늘 엇비슷하지.

날씨가 맑거나 흐리거나 몽롱한 눈빛, 눈비 따위로 괴로움에 찬 얼굴들, 지각할까 미친 듯이 달리거나 지난밤 애인들과 싸워 퉁퉁 불은 기분 또는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아 해장 라면 먹고 싶다 따위의 문제밖에 없던, 그야말로 노말노말 하던 시기였지.


그때 내 기억에 구로역을 빠져나오는 계단은 꽤 길었어.

그런 평범한 하루의 아침, 난 당신을 본 거야.


당신은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아 보였지만 너무 시선을 강탈하고 있었거든. 진짜야. 그래서 나는 회사에 가서 당신 이야기를 했고, 이미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동료들도 당신에 관해 이야기했지. 그 정도였다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구로역 1번 출구 계단 중간쯤 웅크리고 앉아 김밥을 팔고 있었어.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구로역이 정비되기 전이라 계단 중간 또는 역 광장에 샌드위치, 김밥 등 아침에만 장사하는 사람이 많았지. 하지만 내가 그리고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거였어.


당신은 무척, 정말 무척이나 당신이 하는 일을 부끄러워했거든.


김밥을 앞에 가지런히 쌓아두고 웅크리고 앉았는데, 고개를 숙이다 못해 그 긴 머리가 마치 긴 검정 장막처럼 바닥에 떨궈져 있었지. 그래서 우리는 당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어.

처음에는 뭘 파는지도 몰랐다니까!


내가 처음 당신을 눈여겨본 거는 당신의 모기와 귀신의 울음과 양을 합친 "김밥 사세요오오오..."하는 그 가느다란 음성 때문이었어. 일상의 평범을 깨는 당신의 목소리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거든. 그리고 그 음침한 웅크림. 활기찬 아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


아침에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사서 회사 친구들과 나눠 먹는 걸 좋아했던 나는 당신이 정말 김밥을 파는 건지 아닌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아 좀 머뭇거리다 더 가까이 갔지.


"김밥 두 줄 주세요."


당신은 아무런 대꾸 없이 까만 봉지에 천천히 김밥 두 줄을 담아 주었어. 돈을 건네는 그 끝까지, 당신은 얼굴을 들거나 나를 바라보지 않았어. 당신은 쭈그려 앉은 상태였고, 나는 서서 돈을 내민 상태였기에 그저 눈앞에 있는 내 손만 응대하고 있었지.


나는 회사에 오자마자 친구에게 말했지. 당신에 대해. 당신의 목소리에 대해. 그리고 김밥의 맛에 대해.

아침에 무언가를 사면서 그렇게 괴이한 경험은 처음이었거든. 하지만


김밥은 따뜻하고 맛있었어.


그러나 왜 일까.

우리는 서로 당신 목소리와 몸짓을 흉내 내며 누구랄 것 없이 서로 웃겨보려고 했어. 정말이야. 무슨 코미디 대회인 줄 알았다니까. 한참을 깔깔 거렸지.


그런데,

그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을 허전하게 하더라.


몰라.

그때 왜 그랬는지.

그냥. 우리는 너무 지루했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이벤트가 필요했지.

생각해봐. 그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직원 오나 안 오나 숨어서 놀라게 하고 앉아 있는 권태에 빠진 한 가련한 인간의 버둥거림을. 원치 않게 상무님을 놀라게 하여서 놀라는 상무님 얼굴을 보며 내가 더 놀라던 시간을. 반 미쳤다고 할 수도 있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나 일지도 모르지.


그래.

나는 아직도 여전히 당신에 대해 몰라.

영원히 알 수 없겠지.


10월의 첫 날,

난 문득 당신이 떠올랐어.

그래서 조금 하루가 괴로웠어.

계획한 일들은 허물어지고 나는 이병률 산문집을 읽어야 했지.

그래야 마음이 따뜻해질 것 같았지.


가끔 무언갈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추워.

길에 가는 폐지 줍는 사람들을 볼 때 가끔 그래.

그들의 첫 날은 어땠을까.


폐지를 주워야겠다.

무슨 일이라도 해봐야겠다.


하고 처음 밖으로 나오게 되는 날 있잖아.

그런 게 자꾸 상상돼서 말이야.


그래.

이런 시선도 폭력적인 거 알아.

나 따위가 뭐라고 남의 행불행을 가늠해보겠어.


그냥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한 번도,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절대로 상상도 못 한 일을 하게 되는 첫 날을 다들 어떻게 보내는 걸까.


당신은 지금쯤 안녕할까?

웃으면서 그날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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