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레멘타인 Oct 07. 2018

반짝

2018.10.07



오랜만에 행복하네.


머리 위로 몹시 쏟아지는 별 부스러기들을 바라보다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발화된 단어들은 온기가 가득했다. 오랜만이라는 말이 왠지 스스로 미안해서 '오랜만이 아닐지도 몰라.' 하고 속으로만 생각한다.




약 일주일 전.

우리의 약속은 지나가는 말로 예정되어 있었고, 예정이라는 게 늘 그렇듯 시간이 닥쳐올수록 자꾸만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원래 매번 약속을 하면 속으로 혼자 후회하는 얄궂은 버릇이 있다. 게다가 고양이와 함께 한 이후부터 1박 2일이라는 선택은 생각보다 어려운 결정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태풍 콩레이가 깨춤을 추고 있었고, 위험,경보,침수,자제,피해 등의 아찔한 글자들이 자꾸만 내 발목을 휘감았다.


예전의 나라면, 더욱이 혼자만의 약속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 '미안하지만,'으로 시작해서 '다음에'로 끝나는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예정된 시간은 임박해오고 나는 미래의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앞으로 평생 1박 2일 이상의 여행 없는 삶을 선택할 거야?'

'너 앞으로 날씨가 보내는 위험에는 절대 도전 안 할 거야?'


(꽤나 훌륭할) 미래의 나는 정신 차리라는 말과 함께 No.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보내왔다.

그렇게 사는 일은 어딘가 내 영혼이 좀 먹는 일이라는 걸 (어수룩했던) 과거의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으므로 파괴적 충동은 막을 수 있었고, (늘 혼란한) 현재의 나는 떠밀리듯  폭풍 속으로 떠날 수 있었다.



당일 

나와 일행은 '일행'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초면인 사람들이었다.

낯선이들과의 하룻밤이라.

젊을 때는 종종 하던 일도 오랜만에 하려니 어색 열매를 백 개쯤 먹은 듯했지만, 나는 이미 세상의 풍파를 이겨낸 여자이므로 용기를 냈다.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할 일은 단순하다.


다음과 같은 규칙을 지킬 것!


1. 최대한 아무 말이나 하고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이되 약간의 친절과 적당한 유머를 보인다.

2.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아야 하고, 술을 많이 먹었으니 나이에 취하지 않아야 한다.

3. 위 두 가지를 잘 지킨다.


콩이야 팥이야 시간을 후루룩 넘기고, 새벽녘 적당한 취기와 흥이 오를 때쯤, 몇몇은 더 흥이나고 몇몇은 잠들었다.

술이 떨어지고 할 말도 떨어지자 '이 곳에 온 이상 별을 꼭 봐야 한다'는 누군가의 추천으로 우리는 평창의 밤하늘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우왓!


하늘과 가까운 숙소라 그런가?

공중에는 깨진 빛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황홀경에 빠져버린 나는 중력도 잊은 채 고개를 한 껏 뒤로 젖히고 장시간 정지했다.


오늘은 목 디스크가 걸려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가을 갬성이 극에 달하자 어디선가 시가 흐르고,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는 별자리를 알려주기 시작했는데,


어디? 어디?


처마 끝 별을 기준으로 왼쪽 밑으로 별이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아무리 눈을 껌벅거려도 아무것도 안 보였다. 여기저기서 아-,오-,어-등의 탄식이 흘렀고, 나만 점점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하늘이 점점 흐릿하게 보였는데

그쯤이었나,


이걸 한 번 써봐.


그는 자신의 돋보기안경을 휙- 하고 벗더니 무심하게 건넸다.


나는 속으로 '흥. 그래봤자. 별이 별이지. 뭐 얼마나 차이가 있겠어?' 하며 돋보기안경을 코 끝에 걸치자 마자

우악!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별천지였다. 너무나 밝고- 뚜렷하고- 그러니까... 음-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도적인 모습...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방언처럼 나는 계속 악- 소리가 났다.


그동안 나는 흐리멍덩하게 모든 걸 바라보고 있었구나.

세상은 이렇게 더 빛나고 있는데. 진짜를 몰라보고 있었구나.


안경! 내 삶에도 안경이 필요해!



다음 날

가을 갬성과 두툼한 고기와 섞인 술을 뽀자지게 먹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자꾸 어딘가 헛헛해졌다. 아!찌개와 냉면 마무리가 없어서 였을까. 탄수화물 부족인가 싶어 이것저것 꺼내 위장에 털어 넣어도 공복은 채워지지 않았다.


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열심히 하는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이 허기지고 미안해진다.


내일이 없는 비정규적 프리랜서의 삶.
그러나 나는 이런 게으름을 사랑하고 불규칙에 매료되었으며 위험을 감수하고만 싶다. 생각과 취향만 남은 삶에는 종종 당이 없다. 에너지 변환 부족. 더 나은 목적지로 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유지하는 일은 자꾸 실패한다.


목적지:
초행길을 혼자 터덜터덜 통과해 도착하고 싶은 곳.


평창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목표가 있었고, 자신의 밝기를 통해 세상을 비추려는 듯 보였다.

잠시 동안 우리는 초면이지만, 목적지가 있다는 같은 감정 아래 일행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하니
나는 일행이라기보다 일종의 나방처럼 느껴졌는데, 아직 뚜렷한 목적도 목표도 없는 상태면서 그저 빛이 좋아 밝은 곳을 향하는 단순한 행복에 빠져있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칫. 그나마 반딧불이면 좋겠구먼.




그날 밤, 평창의 깊은 숲에는 존재만으로 빛나는 별을 닮은 청춘들이 한자리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뭣도 모르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잠시 마음이 환해졌었다. 


아직 돋보기안경도 없고
당장 어딜가야할지도 모르기에  여전히 흐릿한 상태.
그런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반짝반짝 쏟아지는 것들에 반사되던 그 순간,

꽤나 행복했었다는.



@클레멘타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