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레멘타인 Nov 27. 2018

까먹

아앗! 귤이다!


일과 스트레스에 쪼임을 당하고 있던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우연히 앙증맞은 귤 7개를 발견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집 앞 슈퍼에서 과일을 산 후 잊고 사는 날이 꽤 있다. 날씨가 추워지니 자연스럽게 맥주는 먹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와인을 벌컥 거리며 업무에 시달리고 싶지도 않다. 요즘 같은 시기에 웬만하면 술을 자제하려노력하는 데, 왠지 먹기 시작하면 붙들고 있는 모든 게 귀찮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나타난 귤이 너무 대견하다.


그러니까 귤은,

내가 가장 좋아했었던 겨울 과일이다. 봄에는 딸기에 환장했었고 여름에는 수박에 환장했었으며 겨울에는 어김없이 귤이었다. 가을엔 뭐 밤 정도라고 할까.


어릴 때는 과일 자체가 싫어서 특히 사과는 썩히기 일쑤였는 데, 자취를 시작하면서 과일만 보면 환장병이 돌았다. 그래서 술집에 가면 조건반사적으로 "과일 안주요! 과일 안주요!"하고 목소리를 높였고 지그재그로 썰려 나오는 파인애플이라던지 토끼처럼 마무리된 사과라던지 반토막 나서 살짝 까먹는 재미가 있는 귤 따위가 약간의 사치였던 것이다.


지금은 어떠냐고?

냉장고에 있었는지 어쩐지 까먹는 일이 빈번하다. 까맣게 탄 바나나는 무엇이며 몇 달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썩지 않아 날 무섭게 하는 사과들이 여기저기 뒹굴뒹굴한다. 한 때는 레스토랑에서 생딸기 주스를 사주는 남자가 최고라고 생각했었던 풋내기는 이제 사라진 것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연애 소설을 읽고 독서 모임을 하다 지나간 "했었던 이"들이 떠올랐다. 나는 기억력이 붕어와 맞먹어서 정말 돌아서면 까먹는 타입인데, 인간의 뇌는 정말 무궁무진한 미지의 세계인가. 엇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 속의 인물들이 떠올랐다. 


그날 떠오른 인물들은 대략 서너 명인데, 그중 한 사람은 찜질방에서 이별을 느끼게 한 장본인이다. 찜질방에서 나 홀로 이별이라니. 멋대가리라곤. 물론 그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나는 그랬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다시 전화해 보았으나 다시 통화할 수는 없었다. 안녕도 안부도 없이 헤어진 "했었던 이". 


그 장면을 떠올린다고 슬프거나 외롭거나 고통스러운 건 없지만, 그날 이후로 엄청 울고다닌 내가 기억이 난다. 밥을 먹다가도 울었고 사무실에서 해외 바이어에게 답장을 하다가도 울었다. 사무실은 5평이었고 사장님과 나 둘만 있던 곳에서 나는 억지로 숨을 죽여 울어야 했다. 이를 닦다가도 울었고 길을 걷다가도 울었다. 사장님이 엄청 좋아하는 세꼬시 비빔밥을 먹다가도 울었고 퇴근길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릴 곳을 놓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런 내가 미워서 또 울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슬픔이 밀려오는 일에 어쩌지 못했지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한 건 아닌 거 같다. 게다가 지금 갑자기 생각난 일인데 (정말 쓸데없는 기억들을 왜 지금 꺼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했었던 이"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날 밤, 

새벽에 뜬금없는 문자 소리가 들렸고 어두운 방에 작은 핸드폰 불빛이 비췄다.


"누구야?"

"응. 별거 아니야."


하지만 별거 아닌 게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했었던 이는 심장이 마치 100미터 달리기라도 혼자 하고 온 듯 엄청 빠르게 뛰었다. 나는


"너 심장 엄청 빨리 뛰는데?"


라고 했었던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냥 자는 척했던가.


그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부분이 좀 중요한 부분인 거 같은데. 아무튼 했었던 이는 그렇게 자신의 심장을 따라갔고 나는 꽤 오랫동안 이 일로 긴 글을 썼던 거 같다. 


까먹고 사는 일은 어쩌면 편리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했었던"으로 끝나는 모든 단어들은 어딘가 비릿한 눈물 맛이 난다.

으- 귤이 쓰네.



@클레멘타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