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오리 Oct 30. 2022

치료자는 도구예요

초겨울, 진료실 안

처음엔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했다. 칩거하며 놀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얘기. 놀면서도 즐겁지만은 않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는 얘기. '우울의 신체화' 정도는 여전히 높은 상태. 그는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 불만이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주치의는 소개팅은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았다고 답했다. 그가 잘됐네요, 하고 말해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하지만 앞으로 안 만나요, 하고 말했다. 


“연락이 없거든요.”

“아, 마음에 들었는데 그쪽이…?”


주치의는 이어 말했다.


“실망했겠네요.”


실망. 내가 실망했는가? 실망하긴 했지. 하지만 이제 말해야 할 타이밍이 온 것이다. 막상 말하려고 하니 민망해서 웃음이 나왔다. 어, 음… 제가 이제 이 얘기를 할 수밖에 없겠는데….


“저는 사실 선생님이 제일 좋아서 그렇게 실망 안 했어요. 저 선생님 엄청 좋아해요. 맨날맨날 친구들한테 말해요. 내가 왜 이럴까 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의 선생님은 매우 그답게 평정을 잘 유지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모범 답안을 늘어놓았다.


“치료 과정에서 치료자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일은 종종 있어요. 이 감정의 이유를 살펴보는 게 박오리님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그래서, 내가 왜 당신을 좋아하는지 생각을 좀 해봤다고 했다. 괜찮은 척 안 해도 수용되는 느낌, 취약함을 드러내도 내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이 진료실에서 받고, 그래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당신에게 성적으로 욕망되고 싶다는 욕구가 거기에 들러붙어 있고, 구분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왜 구분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고민했다.


“그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성적으로 욕망되고 싶은 건 좀…. 흠… 비합리적이잖아요.”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서는 아닐까요?”

“제가 선생님께 자자고 할 게 아닌데 어떻게 거절당하죠?”

“잘 못 들었어요. ……아!”


그가 웃더니 자기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했다.


수용된다거나 안전함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느끼는(느껴야 할) 느낌이기에,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닐까, 하고 말했다. 나는 제가 선생님을 좀 세미-보호자처럼 생각하기는 해요! 하고 덧붙였다. 


그는 진료실에서 지금처럼 언어화하여 말하는 것은 아주 안전한 방식이라며,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치료자는 도구예요.”


자기를 도구 삼아(혹은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을 도구 삼아) 나의 문제, 혹은 결핍, 혹은 욕망을 알아 나가 보자는 뜻인 듯했다. 주치의를 사랑하지만 주치의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내게는 생각이 일치하는 의견이었다.


이렇게 진료는 끝이 났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선생님에게도 대놓고 말했듯이 성적인 경계 위반을 시도할 생각이 전혀 없고, 선생님이 내게 성적 욕망을 느꼈으면 좋겠지만 유혹할 생각도 없고, 솔직히 내 아빠든 오빠든 남편이든 아무나 되어 줬으면 좋겠지만 치료자-환자 관계가 가장 아름다울 거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를 도구 삼아 나를 파악하고 나면, 나는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덜 괴로워질까? 그것은 앞으로의 문제. 

작가의 이전글 선생님, 저를 쫓아내지는 말아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