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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리 Oct 30. 2022

보호받는 느낌

1.


주치의는 치료적으로 내 감정을 다룰 때, ‘행동화’를 하면 안된다고 했다. 환자와 치료자 모두가 말이다. 행동을 해버리면 그 행동을 하게끔 한 나의 동기와 생각들을 살펴볼 기회가 날아가고, 행동과 느낌만 남는다. 그래서 지난 진료 때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말’을 한 것을 ‘안전하다’고 표현한 것 같았다. 치료자와 환자가 ‘행동화’ 하기 시작하면 치료는 끝이라는 말도 했다. 남자 환자들 중에서는 치료자에게 막 화를 낸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 거기에 같이 화를 낸다든가… 하면 끝이라고. (일부러 주치의가 나와 주치의의 경우와 가장 거리가 먼 ‘행동화’ 예시를 든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주치의는 치료의 프레임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면서, 혹시 자신이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게 내게 “내가 거절당했다”라는 느낌을 줄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폭력적인 거부의 경험, “나의 뇌리를 스치곤 하는 전 남자친구와의 경험” — 주치의의 표현이다 — 이 다시 떠오를까봐. 그는 수용하는 것이 치료에서 중요한 태도고, 혹시나 앞으로 내가 수용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거나 거절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건 자신이 미숙하고 임상 경험이 부족한 치료자라 일어나는 일일 뿐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나이를 물은 적은 없지만, 역시 젊은 의사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거 몰랐냐는 질문도 했는데, 그는 “박오리씨에게 중요한 문제겠지요.”하면서도, “알고 있었다고 해도 문제, 몰랐다고 해도 문제죠.” 하며 알려주지 않았다.

이번 진료를 엄청 기다렸는데 막상 진료실에서는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주치의와 어쨌든 내 감정을 치료적으로 다뤄보겠다는 결정을 했고, 그에 따라 지켜야할 룰에 대해 협의한 정도.

남자한테 고백하는 거야 여러 번 해본 일이지만, “당신이 이렇게 말하면 나는 이런 느낌이 든다” 같은 말을 당사자 앞에서 터놓고 말하고, 그 당사자가 나와 함께 내 마음을 분석할 거라니. 새삼 민망하다. 고백은 쉬운 거였어…. 



2.

      

약간의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주치의를 보호자처럼 보면서도 그에게서 성적으로 욕망되고 싶었다. 욕망되고 싶은 욕망이 컸지만, 나 역시 성적으로 그를 보기도 했다. 그런데 진료 때의 주치의의 말은… 무엇보다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주치의가 성애적 대상으로서의 남자 같기보다는, 따뜻했다.


‘내가 거절당했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이라는 그 말이 너무나도 치료자같고, 보호자같다고 생각했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겪은 폭력적인 일들이, ‘주치의에게 거절당했다’는 사건 때문에 다시 떠오를까봐 걱정된다는 말도. 앞으로도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은 치료자 자신의 미숙함 때문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당부도. 감동적이었다. 진료 직후에는 얼떨떨했다. 예상하지 못한 말들을 들어서, ‘많이 미리 생각하고 오셨구나, 좋은 치료자다’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곱씹을 수록 그 말들이 나를 감싸주는 것 같다.


환자가 정신과 의사에게 느끼는 전이 감정은 흔한 일이지만 나처럼 열렬하게 선생님이 제일 좋네, 엄청 좋네, 이러고 있으면 사실 속으로는 당황스럽고 불편할 수도 있을 거다. 나는 사실 주치의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행동화’만 안하면 된다는 말만 해도 얼마든지 납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치의가 나의 남자와의 관계에서의 성적인 트라우마까지 먼저 생각해서 말한 것은, 그의 치료자로서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치료자로서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야. 너를 도와줄 거야.


그가 했던 말을 요약해 보자면, ‘네가 남자를 좋아할 때 전남자친구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걸 알아. 그건 일종의 폭력적인 형태의 거부의 기억이지. 너는 지금 나를 남자로 좋아하지. 나는 치료자로서 너를 거부하지 않을 테니 부디 그 기억을 떠올리고 괴로워하지 마.’ 이런 의미였다. 물론 그는 존댓말로 더 장황하게, 덜 직접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정말 보호받는 느낌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어떻게 남자한테서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지? 이 느낌과 비교하니, 그에게 성적으로 욕망되고 싶다고 느꼈던 건 일종의 평가절하였던 걸까 싶기도 하다. ‘어차피 너도 남자잖아’ 하는. 여기서 남자란, 나를 성적으로 보고 결국 내게 해를 끼칠 그런 존재. 그런 의미에서 주치의는 ‘남자’와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치유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내가 이렇게 보호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거지? 새벽이라 감수성이 충만한 걸까?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토록 나는 누군가에게서 보호받고 싶었던 건가? 이거 정말 어릴 때의 양육자를 향한 감정 아닌가? 나는 주치의 앞에서 아이가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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