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오리 Oct 30. 2022

선생님, 저를 쫓아내지는 말아주세요

정신과 의사가 좋아졌다 

토요일이었습니다. 생리를 시작해서인지, 조금은 에너지가 올라간다고 느꼈어요. 심장이 두근거리고 그래서 조금 불안한 감도 있었지만, 동시에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욕이 나기도 했어요. 이게 선생님이 말씀하신 ‘맥락 없는 기분 변화’ 일 확률이 높겠죠? 어쨌든 생리 전보다 다소 ‘업된’ 시기로 접어든 모양입니다.


그래서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나갔죠. 제가 좋아하는 셔츠와 진을 입었어요. 친구가 골라준 귀찌도 하고, 가볍게 화장도 했습니다. 의욕이 있지만 여유도 부리고 싶은 날의 행동인 것 같아요. 운동화를 신고 카페로 가는 길을 걸었어요.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날이 좋아서 기분이 좋았던 것만 생각이 나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여러 논문들을 읽었어요. 지난주보다는 공부의 능률이 올라간 것 같았습니다. 세 시간을 연달아 논문을 읽고, 뿌듯해서 베이글도 먹었어요. 크림치즈를 바른다기보다 거의 얹는 게 전 좋아요. 아무튼 창밖도 보고, 공부도 하면서 그 시간을 보냈죠. 그러다 갑자기 뒷골이 당기더라고요. 오래 노트북 화면을 봐서인 건지, 무거운 백팩을 메어서 그런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라모트리진의 부작용인가 싶어 무서워졌어요. 뒷목을 주무르며 집으로 향했죠.


이제 여기가 기분 변화의 변곡점이에요. 제가 느낀 걸 최대한 자세히 적고 싶었답니다. 집에 들어가니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고 계셨어요. 제가 마음을 쓰는 가족이라, 그녀의 표정, 말투, 목소리의 크기와 톤, 말의 내용까지 신경을 안 쓰는 게 없어요. 이게 K-장녀일까요? 부모와 좀 쿨한 관계가 되고 싶고,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도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정말 짜증이 가득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어요. 정말 어둠의 오오라가 가득했답니다. 너무 신경질적이라 저는 그 이유를 묻고 싶지도 않았어요. 어머니는 제게 쉬라고 했지만, 저는 그녀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저는 그대로 다시 나갔습니다.


그리고 정말 훅, 기분이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습니다. 그녀는 짜증이 가득했을 뿐, 제게 자신이 왜 힘든지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다행이었어요, 절대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곧장, ‘대학원에 간 내 잘못이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해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죠? 저는 어머니가 기분이 나쁜 이유가 경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고, 아버지가 생계 부양자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가 소위 ‘굶는’ 과 대학원에 가서 ‘허송세월’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 것입니다. ‘돈을 벌 걸 그랬어’하고 자책하는 동시에, 또 다른 좌절감이 저를 덮쳐 왔습니다. ‘나는 아무 데도 기댈 데가 없어.’ ‘사는 게 지겨워.’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자고 싶었어요. 집에 가고 싶진 않았어요. 야놀자 앱을 다운받았습니다. 토요일의 모텔 숙박. 가성비를 따져 대며 장장 한 시간 동안 모텔의 리스트를 훑어 내렸어요. 5만 원 정도의 모텔들을 고르고 따져가며 고민했습니다. 고민하다 보니 우습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혼자 모텔에 가본 적은 없는데. 외로울까? 남자를 하나 부를까? 아니, 아무 의미 없어. 어차피 낯선 남자와의 섹스로 달래질 외로움이 아니라는 건 알 정도의 경험치는 쌓였습니다. 틴더의 프로필 내용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습니다. ‘지금 만날 남자를 찾음. 섹스는 안 함. 나의 통제를 벗어날 경우 고소함. 주민등록증 사진을 나에게 보내야 함. 내가 원치 않는 행동을 할 경우 성폭력임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야 함.’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더 우스워졌습니다. 


그런데 더 우습게도, 그때 선생님 생각이 나더군요.


글을 쓰다 보니 맥락이 꼬였지만, 생각이나 느낌이란 게 반드시 선형적인 궤도로 깔끔하게 흐르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내게는 아무 데도 기댈 곳이 없어.’라고 생각한 순간 당신이 스쳐 지나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이 의사에게 의존하고 싶어 했던 건가? 혼란스러웠어요. 당연히 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니까 의지하는 부분은 있겠죠. 근데 이 정도였던 건가? 


솔직히 머리로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아무리 자주 봐봤자 일주일에 20분 보는 사람. 게다가 딱히 선생님이 제게 공감이나 격려를 해주시는 편도 아니잖아요? (나름대로 하신 거라면 죄송합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한 사적인 정보도, 자신의 주관적 생각도 철저히 배제하는 편입니다. 사실 전 그게 마음에 듭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지만, 친절하고 담백하군. 저는 굳이 따지자면 편견이 없고 자유로운 편인 사람이라, 상식적이고 보다 규범적이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하는 당신과 대화하는 게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치료자-환자 관계로서 현재 만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과의 정신과 치료가 처음이라 비교군이 없긴 해요. 감안하시고 들어주십시오.


조금 더 덧붙이자면, 저는 치료자로서의 선생님이 약을 다소 보수적으로 쓰는 것도 괜찮고, 제 의견을 반영해 처방을 조율하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약에 대해 선생님이 피곤할 정도로 알아보고 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할 때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내가 작은 성취를 느낄 수 있게 내게 숙제를 좀 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있지만요.(제 안의 모범생 기질인가 봅니다.) 뭐 아무튼… 장황하죠?


즉, 결론적으로는 저는 선생님과 치료자-환자 관계를 잘 이어가고 싶다는 겁니다. 그리고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 정말 전혀 없답니다. 정보의 불균형(저는 제 내밀한 이야기를 하고, 선생님은 자신의 사적 정보를 전혀 알려주시지 않죠),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의사와 환자의 권력관계.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심지어 성별이 남성과 여성이기도 하죠. 아무튼 저는 선을 잘 지키고 싶은데… 그런데 점점 선생님이 좋아져요. 와, 정말 이 문장을 적으면서 민망해 죽겠어요. 사실 치료자로서 좋아하는 게 크고, 남자로 좋아하는 건 사실 심각할 정도는 아녜요. 하지만 심각해지기 전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제가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답이 없는 이성애자라는 생각도 듭니다. 요새 이렇게 외로웠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치료자를 바꿔야 하나 고민도 했습니다. 저는 제가 공사 구분을 아주 잘할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남자 의사분도 상관없다고 한 건데… 게다가 처음 병원에 올 때는 그저 제 학업에 대한 문제가 크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이렇게 답 없는 헤테로인 걸 알았다면 여자 의사분으로 했을 텐데…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 며칠, 제 생각을 갈무리하다 보니 이게 제게 어떤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선생님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이 있지만, 갑자기 남자로 보이는 건 저의 어떤 취약함 때문인 것 같아요. 왜냐면 저는 사적 관계 속에서의 선생님을 전혀 모르거든요. 그런데도 좋아진다는 건, 제가 의존하고 싶은 대상을 당신에게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사실 어떤 대상을 좋아할 때, 이런 투영이 일어나지 않을 순 없다고 생각해요. 제 자신도 많이 겪었고, 남자들이 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여성상을 투영할 때 많은 괴로움도 느꼈으니까요. 선생님이 예전에 제게, 저의 불만족이 뭔지 일단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죠. 그래서 저는 이 경험이 제가 도망치고 싶었던 어떤 불만족을 맞닥뜨릴 열쇠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선생님도 사람인데, 제가 이런 제 마음을 어느 정도로 오픈해야 하는 건지 걱정이 좀 되긴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정신과 의사니까, 이런 식으로 감정의 전이(제가 이 용어를 제대로 쓴 건 지는 모르겠네요?)를 일으키는 환자들을 수없이 많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썼습니다. 제가 혹시 선을 넘는 것 같다면 선생님이 직업인으로서 커트해주실 거라고 믿고요, 이게 사랑 고백은 아니니까 절 쫓아내지는 말아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제가 선생님이 좋아진다고 해서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절 감추지는 않을 테니 그 부분은 걱정 마세요. 여기까지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거울을 들여다보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