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하고 연민하는 아버지
저주 인형을 샀다. 아버지에 대한 일상화된 증오를 동생과 나누다가 저주 인형 얘기가 나왔다. 누가 먼저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번에 둘 다 폭소했다. “진짜 검색해볼까?” 짚으로 되어 있는 것, 그냥 천에 솜을 채운 것. “짚으로 되어 있는 걸 보관하고 싶지는 않아.” 동생은 솜으로 된 것을 골랐다. 인형과, 인형을 찌를 대못과, 뭐 잡다한 것이 포함된 가격은 배송비 포함 만원. 리뷰를 보니 사람들은 주로 ‘팀장’, ‘부장’ 등, 회사 상사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회사원인 적 없던 우리는 새삼 회사원의 고충을 느꼈다. 저주 인형 네이버 쇼핑 리뷰 글에서….
며칠 뒤 도착한 택배 상자에는 내용물의 정체를 알 수 없게끔 거짓된 정보가 적혀 있었는데, 성의 없는 회사 이름 ‘퓨어 힐링’ 이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뜯었더니 더 가관이었다.
“돈을 얼마나 남겨 먹는 거야?”
저주 인형은 너무 바보같이 생겼다. 허접한 만듦새, 그냥 대가리와 몸통과 사지만 있으면 된다고 여겼을 게 뻔한 제조 공정을 거친 물건이다, 이건. 한마디로 하찮았다. 머리가 크고, 사지는 상대적으로 가느다랗고, 몸통은 뜬금없이 ‘갑빠’가 있는…. 아마 두 팔과 이어지는 몸통 부분의 솜을 고르게 펼 의지조차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재봉도 엉망, 천 재질도 당연히 엉망. 염색한 천조차 쓰기 싫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허연 인간의 형체. 표백을 한 천이긴 하겠네.
가까스로 갖춘 인간 — 혹은 이족보행하는 아무나 — 의 형체인데, 그런데도 뭔가 죄책감이 들었다. 너무 하찮아서 얘를 대못으로 찌르거나 땅에 묻거나 물에 빠뜨리거나 하는 게 망설여졌다. 동생도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쓸데없이 마음이 약하다. “좀… 좀 불쌍해.” 대체 뭐가 불쌍한지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지만, 후진 인형이어도 살아있는 것을 본 따 만든 것이니까… 착한 우리의 연민의 매커니즘이 작동했나보다.
누군가를 저주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물건. 인간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수많은 흉흉한 것들에 비하면 제로에 수렴하는 공격성. 한편 증오의 강렬함 말곤 기댈 데가 없는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증오와 거기에서 촉발된 행동을, 책임지고 싶진 않은 사람이 사용하는.
아버지에 비해 저주 인형이 애처로운 존재 같았다.
“이 패륜아가! 나 없었으면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을 게!”
내가 아버지의 폭력적 행동 — 그는 월셋집의 방문을 주먹으로 때려 부쉈다 — 을 지적한 날, 아버지는 내게 저렇게 말했다. (쌍욕을 섞어서.) 화가 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순간 웃을 뻔했다. 겨우 생물학적 아버지인 걸 강조하는 거 말곤 내게 해준 게 없다는 걸 본인도 아는 것이었다. 동시에, 나는 사실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없어서’, ‘당신이 엄마와 결혼도 안 하고’, ‘나, 오리라는 인간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등신아. (시간 여행이 존재하는 세계관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아, 모든 고통들이 저주로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풀이를 당하는 것은 가정의 약자. 우리는 분을 풀기 위해 저주 인형을 샀다. 저주 인형에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분풀이가 내키지는 않는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할 것인가. 이제 아버지가 없는 사이 그의 방에서 머리카락을 훑어 내고, 이름을 적고, 저주 인형의 심장(인 척하는 솜 갑빠)을 찌를 것인가. 저주 인형을 보고 있자니 역시 그 정도의 악다구니가 생겨나지 않았다. 동생을 보았다.
“산 걸로 일단 만족했어.”
동생도 이 녀석을 찌를 생각이 지금 당장 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매의 양말로 들어찬 서랍에 저주 인형이 끼어 있다는 사실로 일단은 만족했다. 아마도 머지않은 언젠가, 또 아버지가 날 미친 듯이 화가 나게 하면 저주 인형을 떠올릴 순 있겠지. 저주 인형을 떠올리며, 당신과 나의 차이를 새삼 느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 하찮은 비밀을 공유하는 나의 자매가 있으니까. 내가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