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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그런 눈빛으로 보고 싶지 않아 (2)

나는 그녀를 다르게 보고 싶었고

"지난번 만난 애는 무식하게 힘만 셌어."

"너 거친 거 좋아한다며."

"오빠, 그거랑 다르거든? 뭐, 고추는 크더라."

"나쁜 남자랑 나쁜 놈 차이 같은 건가?"


해인은 어느새 내게 말을 놓았고, 우리는 마치 알던 사이처럼 통화를 이어갔다. 그럼에도 해인과의 대화는 여전히 틴더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한 걸까? 남의 섹스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나 지겹고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화제를 바꿔보고자 퉁명스럽게 해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영감은 언제 줄 건데?"


해인은 잠시 말이 없더니 내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로맨스? 아니야, 더 진하게 치정멜로?"


그러자 해인은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럼 내 첫사랑 이야기네."

"갑자기 첫사랑?"


통화 내내 섹스이야기만 조잘대던 해인이 갑자기 첫사랑 이야기라니. 뭔가 상상이 가지 않으면서도 구미가 확 당겼다. 그리고, 해인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오빠는 내가 가벼워 보여?"


해인의 질문에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인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처음부터 가볍게 만나고 그랬던 건 아니다?"

"그럼?"

"굳이 따지면 내 첫사랑 때문이었지."


해인은 생각만 해도 슬픈 이야기라며 한숨을 푹 내쉬었고, 나는 그 숨소리가 꽤나 사연 있어 보이게 들렸다.


"걔는 내가 스무 살 때, 학교 에브리타임에서 만났다?"

"그거 학교 시간표 짜는 어플 아니야?"

"아저씨야. 거기도 커뮤니티 기능 있거든?"


해인은 자신의 첫사랑이야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해인과 동갑이었던 첫사랑 그놈. 그놈은 첫 만남부터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하지만 해인은 당시 교내에서 꽤나 인기가 많았고, 여러 선택지 속에서 해인은 첫사랑 대신 복학생 선배와 연애를 시작했다.


"근데 걔도 포기를 모르더라고."


그 후, 얼마 안 가 해인은 복학생 선배와 헤어졌다. 몇 살 더 많다고 '오빠가~' 하며 가르치려 드는 게 진절머리 났기 때문이다.

이번엔 미팅에서 만난 다른 학교 체육교육과랑 사귀었다. 그리고 또 얼마 못 가 헤어졌다.

그런데, 해인의 옆엔 늘 그놈이 있었다. 답장을 하지 않아도 늘 아침인사를 보내는 그놈. 이때 해인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얘라면 언제나 내 옆에 있어줄 것 같았어. 변함없이."


그렇게 몇 달, 해인은 어느 연애에도 정착하지 못했을 때, 문득 그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라면 정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인은 곧장 그 남자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나오라고. 술 먹자고. 그러고는 둘이서 필름이 나갈 때까지 술을 퍼마셨다고.


"그러고 걔랑 잤다?"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 해인의 눈에 들어왔다. 고갤 돌려 그놈을 보자, 그놈이 한 번 더 해인의 입술에 혀를 넣었고, 둘은 한 번 더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웃긴 게, 모텔을 나서고, 아침 해장국을 다 먹는 순간까지도, 걔는 사귀자는 말 한마디 안 하더라."


유통기한이 없을 것만 같던 그놈의 사랑은, 무더운 날 김밥처럼 섹스 한 번으로 상해버리고 말았다.


"시발놈이네. 그거."


슬프게도, 해인은 그제야 자신이 그놈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끝나버린 유통기한을 믿고 싶지 않아 결국 배탈이 났다.


"그때부터 쭉 내 삶은 걔랑 엮여있었어. 내가 연애를 할 때도, 틴더에서 섹스만 할 때도."


2년, 해인과 그놈이 보낸 시간. 그 기간 동안 해인이 연애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해도, 그놈은 해인에게 연락했다. 해인은 그때마다, 연애의 끈을 놓고는 그놈과 잤다.


"얼마 전에, 새벽에 자기 집으로 부르더라? 근데 가니까 걔랑 걔 친구가 있는 거야."

"설마."

"나랑 하는 거, 자기 친구 구경시켜 줘도 되냐더라고. 같이 하면 더 좋고."

"미친 거 아니야?"

"그냥 뛰쳐나왔어. 이렇게 까지 날 막대하나 싶어서."


자기를 막 대하는 그놈.  

자기를 망가뜨리려는 그놈.

그런데, 웃기게도 해인은 그때마다 그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처음 걔가 고백했을 때, 내가 받아줬다면... 내가 걔를 그렇게 만든 거 아닐까 싶어."


해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쓰레기 새끼 아니냐며 시원하게 욕을 박고 싶었지만, 해인이 그걸 바라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해인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 미안해. 걔한테도, 나랑 만났던 사람들한테도."


엉엉 우는 해인이 바보 같았다.

진짜 바보 같았다.

그런데, 해인의 이야기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울어도 돼."


사랑받고 싶었다. 받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사랑을 갈구했다. 매번 뜨겁고 싶었다.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어느 날 내 감정이 연애로 해결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난 틴더를 켜서 사람을 만났다. 일회성 연애로 그녀에게 위로를 받았다.


해인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이나 던졌다. 네가 정상적인 연애를 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그게 다 네 잘못은 아니라고.

그냥 지금은 해인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냐,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여기서 만난 사람 중에, 날 울린 건 오빠가 처음이야.”

“아이고, 영광입니다."


엉엉 울던 해인은 코를 킁 하고 먹더니, 다행히 울음을 멈추었다. 밝은 목소리도 다시금 들려왔다.


그리고, 해인이 내게 물었다.


"오빠, 혹시 내일 뭐 해?"

"내일? 뭐 없지?"

"집도 가까운데 술 한잔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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