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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꽃이었습니다

#713

by 조현두

어떤 꽃은 지고 나서
잎을 틔우고
잎이 진 자리에
열매를 맺는다고 하지요


나는 그런 꽃이 아니었습니다


피기도 전에
조용히 말라버렸고


스스로를 불량한 씨앗이라 믿었습니다


햇살을 받은 적도 있었고
물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나라는 씨앗이 문제였다고
나는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계절
나는 당신이 떠나기 전
화분을 가만히 매만지던 손짓을 떠올렸습니다


말도 없이
따뜻하지도 않은 손으로
당신은 흙을 놓고 가셨더군요


그땐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준 것이
물도, 볕도 아닌


흙이었다는 것을


그 흙이
아무 말 없이


내가 피지 못했던 시간들을
묻고, 품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 번쯤
자라기를 그만둘까
꺾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아주 작은 잎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어느 날 흙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떠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자리는
텅 빈 것이 아니었더군요


당신은 사랑이 아니라


내가 뿌리내릴
조용한 자리를
남기고 가셨습니다


흙은 기억하고 있더군요 —


내가 사랑받았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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