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은 여름에 빚었습니다

#771

by 조현두

첫눈은 여름에 빚었습니다
햇빛이 가장 오래 머물던
쇄골 아래 그늘에서

젖은 과일처럼 시간은 무르익고
말해지지 못한 손짓들이
피부 안쪽으로만 접혀들던 계절

오늘 나는 지난번 만들어둔 나이를 꺼내어 먹었습니다
이로 깨물자
당신이 숨을 고르던 속도만 먼저 흘러나와
혀에 남았네요

밤은 늘 한 발 늦게 오고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입술이 아닌 체온으로 외웠지요

침묵은 옷처럼 벗겨졌지만
끝내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망설였습니다

눈은 닿기 직전에서 멈추지 않았고
멈추지 않기 위해
서로를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움은 언제나 몸부터 생각합니다
기억보다 먼저 젖어
맥박으로 돌아오는 방식

눈이 내리기엔 너무 이른 밤
여름에 빚진 것들을 데리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빗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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