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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두 Apr 14. 2020

공감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

그런게 이해가 돼요?


상담에서, 그 일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일에 대해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흔히 받는다.

이를 에둘러 표현하는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녀양육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술, 담배, 도박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술과 담배 도박하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는 곧 어떤 일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일을 경험해봐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니 곧 그런 경험이 상담사에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쉽게 귀결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어떤 일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일을 경험해봐야 한다는 논리는 곧, 우리는 결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나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지 타인이 되는 경험을 결코 할 수 없으니,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결국 불가능한 것이다.

공감은 완벽한 이해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해와 공감이란 말 모두를 부정하는 논리가 여기에 담겨 있다. 이는 비단 상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서비스를 부정한다. 종교나 마케팅, 교육, 의료 모든 것들을 말이다. 이 논리 위에서 사람은 참 위태로운 삶을 살아간다.

나 역시 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결국 이해과 공감은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완벽한 일치는 불가하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만큼 해 나가는 것이 사람에 대한 서비스를 하는 일이 가지는 숙명일 것이다.


공감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공감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이면서 사람들이 쓰는 공감이란 단어에 대해 어떤 경향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일상적 발화에서 공감이란 상대의 상태를 자기 것처럼 느끼거나 그런 기분을 의미한다. 이것은 공감이 어떤 상태 즉, 결과를 지칭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감이란 단어 뒤에 -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표현엔 의지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공감이란 단어 뒤에 -한다라는 표현이 붙으면 이는 보다 의지가 들어있게 된다.

그러나 일상적인 발화에서 공감을 하는 것과 공감이 되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말의 흐름상 -한다라는 표현을 쓰더라도 여전히 공감은 결과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감이 결과가 아니라면 어떤가?
공감이 과정이라면 어떤가?

공감이 과정이라면 우리는 공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공감이 어려운 과정에 있는 것이다. 공감이 더 쉬운 경우와 공감이 덜 쉬운 경우가 있을 뿐이다.

사실 공감은 과정도 아닐지 모릅니다.


과정을 넘어 태도로 말하면 어떤가?
공감을 태도로 말할 때, 의지가 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비로소 공감-한다 는 생명을 가지고 살아있는 표현이 된다.

공감을 '적극적인 의지가 담긴 과정으로 경험하려는 태도'로 이해하면, 그때부터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나처럼 많은 초보 상담자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이 아닌가 하여 몇 자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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