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릴 때를 놓쳤어

by 조현두

나는 옛날에 대학 다닐 적에 기차를 타고 다니곤 했다

오후에 수업에 있거나 하면 오전까지 늘어지게 자는 거지

그러다 슬그머니 일어나서 내 오랜 동네를 떠나 신식으로 바뀐 기차역으로 가서

가장 싼 표를 끊고선

먼지와 소음이 가득한 플랫폼에서 기차가 오는 쪽만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는 거야


휑한 플랫폼에서 한참 있다 보면

어쨌든 기차는 오니까


쇠와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 끌고 오는 기차

어쩐지 그 기차만 타면 나는 노곤해지곤 해서

한 40분 정도 되는 그 시간에 까무룩 잠들곤 하는 게 보통이었다

어째서일까 도저히 잠을 견딜 수 없었거든

참 일상은 고단한 거거든


하루는 내가 내릴 역을 놓쳤어

눈을 떠보니까 내가 내릴 역 이름이 내 뒤로 지나가고 있더라고

허탈하게 웃으면서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그냥


다음 역에 가기로 했다

돌아오면 되니까


내가 내렸던, 한 번도 기차를 타고 가본 적이 없었던 그 역

어쩌면 다시는 다시 갈 일 없을 그 역

나는 그 역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해

왜일까


붉은 가을의 자국이 선명하게 산등성이에 새겨진 모습

마른바람 타고 오는 깊은 계절의 향기

낯선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만

즐거워지더라

돌아가면 되니까

내릴 때를 놓쳐도 돌아가면 되니까

그래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괜찮을 거니까 다

괜찮을 거니까


내릴 때를 놓쳤어

그 덕에 마음에

그 하루 넣어두고

오늘까지 슴슴하게 우려내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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