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어항에 물을 채웠다.

#345

by 조현두

지난 가을이었나 아니면 겨울이었나 불긋하게 물드는 잎사귀가 마르고 꼿꼿하던 잡초들도 고개를 떨구는 그런 계절, 아무튼 그 즈음이였다.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간 너를 원망하기도 바쁜 시간이었지. 어째서인지 익숙한 내 방문을 열면 익숙한 모습이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있을리 없는 것을 알지만 기대하게 되는 무정한 희망에 얄팍하게 기대는 하루가 매일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눈에 들어온 작은 어항 하나. 니가 내게 남긴 것은 일찌감치 다 치워버린 줄만 알았는데 어항은 원래 거기 있었던 것 마냥 있었다. 복주머니 같은 생김새에 투명한 어항. 어짜피 내 것이 아닌 것은 다 치웠으니 그것도 쉽게 치울 수 있건만, 나는 그것만은 치우질 못했다. 어쩌면 치우고 싶지 않았을까. 작고 텅 빈 어항은 한숨과 먼지만 채워져갔다.


몇번의 겨울 바람 따라 눈송이가 날렸고, 가녀린 겨울 볕도 볕의 역할을 하는지 목련의 꽃송이가 알전구 같이 올라오던 하루. 나는 텅빈 어항을 부엌으로 가져가 투박하게 물을 채워 넣었다. 그냥 텅 빈 어항에 물을 채웠다. 투명하고 조잡하던 어항이 조금 그럴싸했다. 깨끗한 물을 넣어보니 어항이란 모양에 맞게 물고기를 가져다 넣고 싶었다. 깨끗한 물을 모두 하수구로 버리고 어항 하나 달랑, 휴대폰 하나 달랑 챙겼다. 그리고 철지난 롱패딩 주섬 꺼내어 김밥처럼 차려입고는 몇 정거장 떨어져있는 수족관을 찾아갔다. 지나다니는 길에 자주 보았지만 한번도 가본적이 없던 오랜 수족관.


아저씨 여기에 물고기를 키우고 싶어요. 수조 속 아름다운 물고기들. 한적한 그들의 유영을 따라 내 공허한 말이 수족관 안에서 일을 보던 주인 아저씨에게 닿았다. 커다란 아크릴 유리너머 맑은 물고기 눈처럼 날 쳐다보던 수족관 아저씨가 말갛게 껌뻑였다. 이런데는 물고기 키우기가 적당하지 않은데, 다른 어항을 마련해보는 건 어때요? 그러고 보면 그 수족관은 지나다니면서 볼때는 허름했는데 안은 세상 아름다웠다. 물고기들은 행복해보였고 수조는 엄청나게 컸다. 그에 비해 내가 가져간 복주머니 모양 어항은 텅빈 것이, 어쩐지 발로 툭 차면 깨질것 같아보이기도 했다.


나는 한참 어항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래도 여기다 키우고 싶어요. 그러자 수족관 아저씨가 구피를 몇마리 가져가서 키워보라고 했다. 구피가 뭐에요. 송사리 같은것 있어. 잘 커요. 무심한 수족관 아저씨. 먹이도 주세요. 그것은 돈주고 사가야지. 휴대폰으로 익숙하게 결제한 후에, 나는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 수족관을 나왔다. 그렇게 구피 몇마리가 내 어항에 살게 되었다.


다시 집에서 어항에 물을 채웠다. 이번엔 먹던 생수를 뜯어서 투명한 물을 채웠다. 그리고 어항에 봉지째로 구피를 넣었다. 물은 섞이지 않지만, 같은 온도가 되어 갈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어항이지만 구피들은 이제 거기서 살게 될 것이다.


다시 물이 마르는 계절이 되었다. 텅빈 어항의 구피는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모래와 자갈을 어디서 가져와 깨끗이 씻어 넣었다. 수초도 조금 넣었다. 작고 볼품 없던 어항을 채웠다. 제법 예뻐졌다. 옛날엔 텅빈 어항이었다. 어항만 남긴 니가, 여전히 가끔은 말도 없이 떠나간 니가, 이 방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만 이제는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다. 텅빈 어항을 채웠다. 이제는 구피가 산다. 어설프지만 살아있는 것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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