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을 안 하다 보니 차가 오래도록 주차장에 방치돼 있었다. 아예 잊고 살다가 두 달쯤 지나 가봤더니 먼지를 뒤집어쓴 차가 어쩐지 서러워 보였다. 차에 이름까지 붙이며 아껴주는 달콤한 차주들도 있는데 나는 너무 애정이 없는 걸까. 애초에 출퇴근을 위해 언니에게 급히 산 차였다. 치열한 협상 끝에 300만 원을 주고 산 작은 차를 매우 잘 타고 다니긴 했지만, 사용가치만 따져 시작된 관계라 달콤한 마음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먼지를 뒤집어쓴 나의 이름 없는 차가 때 구정물 묻은 아이 얼굴처럼 보여 얼른 차에 올라탔다. 맘 상하지 말라고 어르듯 근처를 짧게 돌았다. 어르면서도 속으론 언니에게 도로 팔까, 250만 원이면 될까, 배신할 생각을 했지만, 근처를 돌고 와 주차장에 주차하면서는 이곳에선 차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서울에 살고 있다면 당장 처분했겠지만, 대중교통이 미흡한 이곳에선 차를 이용할 일이 가끔 생겼다.
그날부터 일부러 차를 데리고 나갈 궁리를 했다. 근처 마트에 걸어가려다가도 지난 한 주 운전을 안 했다면 대형마트까지 차에게 콧바람을 쐬어주는 식으로. 1~2주에 한 번이라도 운전을 해줘야 차의 몸도 마음도 안 상할 테니까.
회사를 그만두고서도 운전을 하려고만 하면 엄청나게 할 수 있긴 했다. 북토크를 하러 대한민국 곳곳을 평생 가본 것보다 더 많이 갔으니까. 운전해서 가는 게 더 편할 곳을 대중교통을 이용해 갈 때면 이게 뭔가 싶었지만, 나는 다음에도 여지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차가 있는데도 운전하지 않는 이유는, 운전 내내 긴장을 해야 하는 게 싫어서다. 초행길이 주는 긴장감이 내겐 너무 크다. 모르는 길은 두 발로도 가기 힘든 길치인데 네 발로 달려야 할 때면 더욱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초행길을 몇 시간씩 운전해야 하면 나는 며칠 전부터 휴대폰을 들고 모의 주행을 해본다. 혹시 가는 길에 어려운 코스가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차로 15분의 가까운 거리라고 해서 가는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15분 정도의 긴장감은 견딜 수 있지만, 이번엔 주차가 문제다. 정확히는 주차장 입구가 문제다(나는 주차는 잘한다, 정말!). 주차장 입구가 건물 어디에 뚫려 있는지 나는 그걸 꼭 미리 알고 싶다. 입구를 못 찾으면 천천히 운전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되지만, 그게 너무 힘들다. 마음이 안달 나고 속이 탄다. 그래서 초행길엔 미리 지도 앱으로 목적지를 확인한다. 주차장 입구가 뚫린 지점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다. 지도 앱이 해결해주지 못하면 어느 친절한 블로거가 가는 길을 꼼꼼히 포스팅한 게 있는지 찾아본다. 요즘은 건물 입구는 같은데 왼쪽 길은 아파트, 오른쪽 길은 상가로 나뉘는 곳도 많아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울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역시 어느 쪽으로 들어가야 할지 알아둔다. ‘초록색 선만 끝까지 따라가세요’ 같은 문장을 나는 사랑한다.
내가 이런 운전자이다 보니, 조수석에 누가 앉길 바라게도 되고 바라지 않게도 된다. 옆에 누가 앉으면 함께 길을 봐줄 사람이 있으니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심하게 의지하게 된다. 곧 우회전을 해야 한다면 이번에 해야 할지 다음에 해야 할지 옆에 앉은 사람이 말해주길 바란다. 이번이야, 라고. 만약 길을 잘못 들면 그때부턴 신경이 삐죽하게 곤두선다. 이럴 땐 차에 탄 모두를 조용히 시켜야 한다. 두 발로 걸을 때도 길을 찾을 땐 이어폰을 빼야 할 정도로 멀티가 안 되는 나를 위해서다. 이런 나이기에 나는 누가 옆에 앉길 바라지 않기도 한다. 잔뜩 긴장한 데다 신경이 곤두서기까지 하더니 입도 다물라고 하는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이럴 거면 차가 왜 필요할까 싶겠지만, 처음 한두 번이 문제지 그다음부턴 괜찮다. 길도 대략 파악하고 주차까지 해봤으면, 이젠 여유로운 운전자가 된다. 내비게이션도 필요 없을 만큼 눈에 익은 길을 달릴 땐 다른 운전자들처럼 창턱에 팔도 걸칠 수 있다. 그러나 여유로워졌다고 음악 볼륨을 크게 높이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거나, 옆 사람과 지속적인 대화를 하진 않는다. 역시 운전할 땐 긴장이 좀 되니까. 집에 있을 때처럼 조용한 상태로 운전하길 좋아한다. 신호 대기 중이면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띄엄띄엄 잡생각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운전 중에 잡생각을 할까. 하면 안 되지만 나는 자꾸 하게 된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그만 생각해, 운전에 집중해, 라고 소리 내 다그쳐 생각을 멈출 때도 있다. 교차로의 신호 대기줄 맨 앞에 섰을 때가 잡생각 하기에 딱 좋다. 잡생각이 길어지면 뒤차가 빵 하고 클랙슨도 울려주니 스스로 다그칠 필요도 없이 절로 정신을 차리게 된다.
언젠가는 신호 대기 중에 참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다. 각기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차들을 보며, 우린 정말 다 각각의 개인이네,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신호에 따라 출발하거나 멈추고, 직진하거나 좌회전하고, 또 우회전해 어딘가로 가는 차들이 자신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은유처럼 보였다. 모두 자신만의 길을 가는데도 질서가 지켜지는 것 또한 새삼 대단해 보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위해 질서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순간 교차로에 있던 모든 운전자에게 애정이 생겼다. 불특정 다수에게 생기는 이런 애정은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라, 나는 이 새삼스러운 생각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로 했다.
운전을 하다 보면 특정 개인에게 애정이 생기기도 한다. 이 운전자 저 운전자에게 툭하면 반한다. 애매한 끼어들기 상황에서 나의 좌회전 신호에 기꺼이 속도를 낮춰줄 때, 반대로 내 앞에 끼어든 운전자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고마움을 표시해줄 때, 자기가 생각해도 무모하게 끼어들었는지 미안하다며 역시 비상등을 깜빡일 때, 성별도 나이도 당연히 이름도 모르는 운전자들에게 반한다. 좋은 사람, 속엣말을 하며. 한번 세게 반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예뻐 보이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내 눈에는 그들이 탄 차도 온통 예뻐 보인다. 크면 커서 예쁘고, 작으면 작아서 예쁘고, 색도 찰떡같고, 뒤태도 멋지다.
도로 위 천사들이 내게 미친 영향은 꽤 크다. 재작년, 내가 세상에 유해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세상을 좋은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하나하나가 세상을 좋지 않은 쪽으로 끌고 가고 있음이 선명히 보였다. 제로 웨이스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거의 끊었던 고기도 전보다 더 먹고, 한 사람에 대한 뒷담화를 끊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누적된 경험이 편견을 굳히기도 하는 등 죄책감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었다. 내가 있어서 세상에 좋을 게 무얼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나의 유해함을 점점 더 크게 의식하게 될 것 같아 뭐라도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게 차도 위에서라도 아주 작은 친절의 행동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내 앞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차가 있으면 무조건 허용해준다. 교통 체증이 심해 차들이 다닥다닥 붙어 갈 때도 멈춰 서서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준다. 흐름에 방해가 되면 안 되기에 차 한 대, 아니면 두 대 정도만 끼어들게 해주는 것이지만, 앞차가 고맙다며 비상등을 깜빡이면 나의 유해함의 무게가 희미하게 덜어지는 것만 같다. 내가 저지르는 일들에 비해 이 작은 친절은 매우 미미하지만 그래도 나는 도로에 친절을 슬쩍 뿌리는 일을 계속한다.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었던 운전자들처럼.
얼마 전 제46회 이상문학상 수상집에서 최은미 작가의 단편소설 「그곳」을 읽는데 나와 비슷한 인물이 나와 반가웠다. 친절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나’는 자주 마주치는 택배 기사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내가 먼저 길을 지날 때는 택배차가 속도를 늦췄고 택배차가 먼저 지날 땐 내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그 사실에 갑자기 눈물이 날 때가 있었다. 트럭이 나를 보면 멈출 것이라는 걸 내가 알았다는 사실에.” ‘나’는 말한다. “내가 의지했던 친절의 순간들도”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고.
이런 글을 읽을 때도 나의 유해함의 무게가 미세하게 덜어지는 기분이 든다. 내 작은 친절이 ‘그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