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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Oct 06. 2023

세 명의 독자

지난가을, 서울 신사역 근처 북카페 카페꼼마로 갔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선한 만남이 이곳 카페에서 있을 예정이었다. 번역원 초청 행사로 한국에 온 이탈리아의 편집자가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의 저자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만나보겠느냐는 연락을 받았을 땐 순간 긴장이 돼 망설였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고서야 내가 어떻게 이탈리아 편집자를 만나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이번엔 내 쪽에서 꼭 만나보고 싶어졌다. 이어 신기한 기분이 머리카락 끝까지 전해졌다. 이탈리아라니. 움베르토 에코와 프리모 레비와 엘레나 페란테의 나라잖아. 나는 여전히 이 모든 일이 신기하다. 출간도 불투명했던 소설이 출간되어 독자를 만나고, 예상 밖의 사랑을 얻고, 이젠 다른 언어를 쓰는 독자에게까지 전해지려 하고 있었다.      


북카페로 들어서자 출판사 대표님과 한국문학번역원 직원분이 맞아주었다. 곧 통역사님과 이탈리아 편집자님도 도착했다. 기둥 옆 테이블에 앉은 우리는 마스크를 낀 채 어색하게 눈웃음을 주고받았다. 호감의 눈빛도 서로에게 전달했다. 통역사님이 통역 방식을 간단히 설명했고, 나는 괜히 영어 한마디 하려다 집중력을 잃는 대신 모든 걸 통역사님에게 의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영어를 대하는 한국인의 고질적인 듣기 평가 모드가 나오려 했다. 눈은 지그시 감고 귀는 스피커로 향하던 그 시절의 습관이 나오려 해 눈을 똑바로 뜨고 이탈리아 편집자님을 바라봤다. 편집자님은 저자에게 직접 소설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싶어 오늘 이 만남을 요청했다고 했다. 뭘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소설을 쓰기 전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첫 에세이가 잘되었다면 소설을 쓸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도, 그다음에 쓴 에세이가 투고에 실패하지 않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말 또한 하지 않기로 했다. 에세이스트의 삶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면 쓰지 않았을 소설. 원하던 것이 좌절된 상황에서 쓴 소설. 원하던 것이 좌절되었기에 쓸 수 있던 소설. 이 소설은 내게, 어떤 기회는 술술 풀리는 인생에서가 아니라 끊어지고 막혀 돌아가야만 하는 인생에서 빛을 보게 된다는 걸 알려주었다는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말을 하기엔 카페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날 보는 그녀의 표정도 더없이 밝았다. 나는 즐거운 이야기만 하기로 했다.      


편집자님은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며 이것저것 물어왔다. 소설에 어떤 책들이 인용되어 있는지, 왜 작가가 되기로 했는지, 계획하고 있는 다음 소설이 있는지 등등. 그녀에게 나도 물었다. 왜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녀는 팬데믹과 이탈리아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을 언급하며 최근 이탈리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Feel Good’ 소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소설, 팍팍한 삶을 달래주는 부드러운 소설이랬다. 한국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삶을 달래는 하나의 방법에 소설이 있는 건 같은 듯했다.


그날의 만남은 기분 좋게 시작해서 기분 좋게 끝났다. 어차피 그날 결정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한 말들과 나라는 사람의 매력이 과연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긍정적인 효과를 노리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것도 아니었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작은 점에서 시작한 내 책이 파문처럼 은은히 퍼져나가는 과정을 이렇게라도 접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내 손을 떠난 이야기는 어디까지 나아갈까. 이 이야기가 각각의 개인과 맺는 순간에선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까.      


그날 이후 다른 나라들과도 번역 출간이 논의되면서 나는 내 소설의 시작이 되었던 작은 점, 세 명의 독자를 자주 생각했다. 2018년에 쓴 소설을 2019년에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연재하기 전, 내겐 최초의 독자 세 명이 있었다.      


소설을 썼는데 왜 출간하지 않느냐는 엄마의 질문은 1년 내내 반복됐고, 흘려듣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내가 쓴 소설을 누군가가 읽어주길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집 근처 인쇄소에서 A4용지에 소설 세 부를 인쇄했다. 내 글을 정성 들여 읽어줄 세 사람에게 전해줄 소설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한 부를 주고, 언니에게 다른 한 부를, 그리고 언니의 친구이자 책 덕후인 하나 언니에게 마지막 한 부를 보냈다.      


이후 며칠은 평소보다 더 자주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한쪽 모서리에 스테이플러가 찍힌 A4용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소설을 읽고 있는 엄마를 보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종이를 한 장 넘길 때마다 엄지 손가락에 침을 묻혔고 표정은 매우 결연했다. 어디까지 읽었어? 가만 있어봐. 매번 비슷한 대화를 나누고 방으로 들어올 때면 괜한 짓을 저지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로서 나도 잘 안다. 재미없는 책을 정독해야 하는 일만큼 고역이 없다는 걸. 더더군다나 세 명에게 나라는 존재는 혈연이거나 친구의 혈연 아닌가. 재미없다고 중간에 그만 읽기엔 너무 끈끈한 존재.      


얼마 후 엄마는 방문을 열고 들어와 책상에 두꺼운 A4용지 무더기를 툭 올렸다. 복잡한 마음으로 빤히 보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최고, 너무 재밌다, 너 글 정말 잘 쓴다. 어김없이 터져 나온 엄마의 칭찬. 사실 나는 엄마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내 글을 처음 보여준 그날부터 엄마는 스스로 비판적인 독자이길 포기했다. 어떤 글을 보여주든 칭찬을 남발했기에 나는 작가 자아가 쪼그라들 때마다 엄마에게 글을 보여줬다. 무조건적인 칭찬이 필요할 땐 엄마만 한 독자가 없었으므로. 이번에도 칭찬을 남발한 엄마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책상에 올려놓은 A4용지 무더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왜? 묻는 내게 엄마는 한 번 더 읽어야겠다며 방을 나갔다.      


며칠 후 언니에게도 연락이 왔다. 언니는 짤막한 감상을 전했다. 나 울었어. 짧아도 너무 짧은 감상이었지만 나는 이 감상이 놀라워 언니에게 물었다. 어느 부분에서? 내가 쓴 소설을 읽고 울 수 있다니, 그것도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언니가. 언니는 언젠가부터 허구의 이야기에서 관심을 뚝 끊더니 소설도, 영화도 즐기지 않았다. 형부와 조카가 영화를 볼 때면 극장 근처 카페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기다린다.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건 나랑 같은 건데, 그런 언니가 소설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니, 내겐 매우 고무적인 감상평이었다. 이후 언니는 응원의 의미로 동생의 소설을 읽고 또 읽어서 다섯 번 완독을 끝냈다.      


마지막으로 하나 언니와 통화를 했다. 부끄럽고 민망해 문자로 가볍게 감상을 들으려 했는데 언니가 통화를 원했다. 중학생 때부터 알아온 언니가 작가님이라고 불러주며 본인은 한 시간도 넘게 감상을 전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다고, 내가 만든 세계가, 그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언니가 꿈에 그리던 것들이었다고 말하며 나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인물 하나하나의 대사까지 읊으며 뭐가 좋았는지 요목조목 밝혀주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너무 놀랍고 신기하고 민망한 나머지 연신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언니가 그 상황에서 그 인물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냐며 물을 때는 내가 쓴 소설이 정말 소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특히 언니가 알고 지내는 사람처럼 인물들 이름을 부를 땐 울컥하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마치 아는 사람처럼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내가 소설을 읽을 때면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알고 지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되어버린 바람에 이젠 내게 너무 큰 의미가 된 허구의 인물들을 생각하는 것. 그렇게 며칠을 생각하다 생각이 흘러넘쳐 결국 누구라도 붙잡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내가 늘 하던 일이었고 지금 하나 언니가 내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언니는 통화를 끝내는 순간까지 나를 응원해주었다. 언니가 좋아하는 다른 소설처럼 내 소설도 좋았다고.      


틈 없이 촘촘한 칭찬의 말들이 내 안에 가득 들어찼다. 나를 지지하는 마음으로 나의 소설을 열렬히 극찬한 세 명의 독자가 나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작가는 어떤 문장도 실패 없이 써낼 수 없다는 면에서 결코 끝까지 자만하지 못한다. 글을 쓰기 전엔 실패를 예견하고, 글을 쓰면서 예견이 현실화하는 걸 매일 보는 사람이기에 아무리 어깨를 펴려 해도 자꾸 위축된다. 작가에게 틈 없는 지지가 필요한 건 이 때문일 테다. 위축된 어깨를 펴고 용기 있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세 독자의 감상을 들은 얼마 후, 나도 용기를 냈다. 소설을 연재해보기로 한 것이다. 네 번째 독자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때를 돌아보면, 세 사람의 애정과 진심이 단단한 공이 되어 호수로 퐁당 던져지는 모습이 그려진다. 작은 공이 호수 깊이 빠져들며 파문의 시작을 알린다. 세 사람의 마음이 멀리 퍼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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