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크를 하는 기분은 어떨까. 작가가 되고 나서 가끔 상상해보곤 했다. 소설을 읽다가 작가로 등장하는 인물이 북투어를 하는 장면을 보거나, 에세이에서 작가들이 북토크의 이모저모를 알려줄 때, 나라면……? 하고. 책이 출간되면 괜히 좌불안석으로 북토크 요청이 들어오면 어쩌지 걱정하기도 하고, 결국 요청이 안 들어오면 그럴 줄 알았다며 혼자 김칫국을 마셨다 말았다 하는 거, 나뿐만은 아니겠지.
첫 책을 내고 북토크를 한 적 있지만, 이건 북토크라기보단 축하 파티에 가까웠다. 나의 출간을 축하해주기 위해 마음 너른 지인들이 만들어준 자리. 나를 모르거나 나의 지인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자리였는데도 나는 목구멍이 꽉 막힐 만큼 긴장했었다. 하필 감기에 걸리기까지 해 중간에 기침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더해져 북토크 시작부터 끝까지 내 정신이 아니었다. 진행자도 지인, 낭독자도 지인, 질문자도 지인의 지인인 홈그라운드 같은 환경에서도 정신을 못 차렸는데 진짜(?) 북토크를 하게 된다면…… 아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어려워지곤 했다.
그럼에도 한 번씩 상상해보는 것이다. 내 책을 읽은 독자와의 만남을. 이 만남을 가장 상세히 상상해본 건 킥복싱 에세이를 쓰면서였다. 책이 나오기도 전에 북토크 장소와 날짜 및 시간, 깜짝 이벤트, 드레스 코드까지 기획을 마무리 지었다. 장소는 내가 킥복싱을 했던 체육관, 날짜는 책이 출간되면 2개월 안에 성패가 결정 난다고 해서 ‘패’로 결정 나기 전 주말의 토요일, 시간은 오후 3시(그냥 이 시간이 가장 적당해 보였다), 깜짝 이벤트는 나를 가르쳤던 코치님들의 지휘 아래 참여자 모두 킥복싱해보기(내 마음대로 코치님들을 주말 출근시키기로 했다), 드레스 코드는 킥복싱을 해야 하므로 세상 편한 츄리닝. 생각만 해도 건강과 재미를 다 잡은 북토크가 될 듯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바이러스가 돈 바람에 기획까지 끝낸 북토크는 상상 속에만 머물게 되었지만, 바이러스가 돌지 않았다고 해서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북토크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건 출판사와 작가지만, 기획과 준비가 있기 전 북토크에 와줄 독자가 먼저 존재해야 하기에. 북토크를 연다고 독자가 와줄까. 그런데 독자는 누구일까. 드레스 코드까지는 꼼꼼하게 상상해봤지만, 나는 나를 보러 와줄 독자 모습만은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누군가가 내 책을 읽어주는 것도 실감 나지 않는데, 그 누군가가 황금 같은 주말 시간에 나를 보러 와준다는 것 역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상상이라도 믿기지 않는 일을 구체적으로 그리긴 어려워 내 상상 속에서 독자들은 연필로 그린 듯 흐린 테두리로만 겨우 존재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작가가 된 지 5년 만에 진짜(!) 북토크를 하게 되었다. 지인들이 마음을 모아 마련해준 북토크, 나만의 상상 속 북토크를 지나, 생애 처음으로 독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비대면 북토크를 몇 번 거친 뒤 하는 첫 대면 북토크. 북토크 장소는 서울 관악구에 있는 동네 서점 ‘자상한 시간’이었는데, 경기도로 이사를 오기 전 내가 매달 소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다. 북토크가 있던 날, 서점으로 걸어가며 나는 차라리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했다. 그날 하게 될 첫 북토크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가는 평정심을 잃을 것 같아서. 가능하면 담담하고 의연하게, 내가 봤던 다른 작가들처럼 멋지게 독자들을 만났으면 싶었다.
서점엔 열다섯 명 정도의 독자가 와 있었다. 나는 독자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서점 대표님과 나란히 앉아 짧게 근황 토크를 나누고 나서 본격적으로 북토크를 시작했다. 독자에겐 ‘작가와의 만남’이 될, 작가에겐 ‘독자와의 만남’이 될 시간이었다.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하기, 이게 내 전략이었다. 북토크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게 궁금해하는 걸 가장 진실에 가깝게 최선을 다해 대답하는 것일 테니까.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부질없는 색색깔 포장은 벗기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 말하려 노력했다.
독자와 나는 1미터 사이를 두고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상대의 감정까지 알 수 있는 거리. 존재조차도 가늠하지 못하던 독자와 갑자기 너무 가까워져버린 것이다. 이 거리가 낯설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을 했다. 그러다 한 번씩 고개를 들 때마다 독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서로 어색해하고 난리였다. 물론 몸으로 난리를 치진 않았지만 매우 수줍은 난리가 나와 독자 사이에 있었다.
독자의 질문을 받는 시간. 손을 들고 질문하는 독자의 목소리를 듣는데, 나름 잘 통제하던 감정과 마음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쓴 문장을 읽던 순간의 감정을 부드럽게 전해주는 목소리, 내가 쓴 소설 속 인물에 깊은 공감을 드러내는 목소리를 듣는데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올라왔다. 자칫 잘못하다간 울어버릴 수 있겠단 생각에 나는 감정을 단단히 붙들고 독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독자와 말을 주고받는 사이, 흐린 테두리로만 존재하던 그들이 서서히 진동하며 그 안이 따뜻하고 물렁하게 꽉 채워지는 게 느껴졌다. 독자는 존재했다, 너무나 구체적으로. 그날, 나는 독자를 만났다.
이후 독자를 만나러 열심히 다녔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도 달려가고 네 시간도 달려갔다.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다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나라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었다. 체력이란 한계, 내향적 인간이란 한계, 가는 방법과 오는 방법이 묘연하면 그 어디든 가지 못하는 길치의 한계, 그리고 버스를 오래 타면 간혹 호흡이 불안해지는 예민한 인간이란 한계. 이 모든 한계를 피해 가며 전국으로 갔다.
북토크는 해도 해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말을 하는 게 어려웠다. 나더러 말을 하라고 마련해준 자리인데도, 나 혼자 이렇게 오래 말해도 되나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얼른 말을 마무리하기도 했고, 말을 많이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내가 한 말의 양에 짓눌려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열심히 다닌 건, 당연히 독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혼자 말을 하는 것도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나지만, 북토크에선 독자들의 둥그런 눈빛에 의지하며 한 마디, 한 마디 나에 대해 말했다.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고, 독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내가 말을 할 때면 말과 생각이 공간 여기저기에서 반갑게 만났다 헤어지는 게 느껴졌다. 북토크에 갈 때마다 나는 욕심을 품었다. 오늘 이 만남이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길, 집에 돌아가는 길이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지길. 나는 매번 그랬는데, 독자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작가란 누구이고, 독자란 누구일까. 작가란 어딘가로 걸어 나가 쭈뼛거리는 자세로 프리 허그를 하겠다며 혼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독자란 그런 작가에게 다가와 안아주는 사람. 작가의 입장에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니, 여길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아무도 안 올 줄 알았는데. 작가에게 독자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 독자 입장에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니, 지금까지 어디 계셨나요, 한참 찾아다녔잖아요. 독자에게 작가란 거기 있어주어 고마운 사람. 서로 수줍게 껴안은 두 사람은 똑같은 크기의 고마움을 느낀다. 작가가 되어 좋은 건, 이 두 마음을 다 알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