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을 쓰고 있다고 걸 아는 몇몇 지인들은 이참에 등단을 해 보는 건 어떠냐며 농담을 해왔다. 그러면 나는 마치 엄청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팡 터트렸다. 아이고,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그냥 내가 한 번 소설을 써 봤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기로, 하지만 이왕 썼으니 어딘가 블로그나 브런치 같은 곳에 연재 정도는 해보기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목표가 낮았기에 소설을 쓰면서 부담이 크지 않았다.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니 '작가의 벽'도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압박은 있었다. 소설을 쓰는 4개월 동안 하루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딴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다음 이야기를 구상했다. 그렇더라도 이야기가 착착 진행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 더 컸다. 어찌 됐건, 나는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휴남동 서점'이라 이름 붙인 소설을 드디어 완성했다. 주요 인물은 여섯. 영주, 민준, 준서, 승우, 지미, 민철. 이 여섯 명이 휴남동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 과거를 치유하고 함께 오늘을 꾸려간다는 소소한 이야기. 소설을 쓰기 전 영화 <리틀 포레스트> 같은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도 아주 조금씩 내 안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이야기.
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궁지에 빠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평범하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 중 궁지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궁지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을까. 글쎄. 이 고민을 하면서 소설을 썼다. 내가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궁지에서 탈출하기 위해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나를 좀 쉬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묻지 않고 기다려주면서 언제든 친절한 손길을 내밀어주는 것이다.
나는 사람 사이의 느슨한 연대가 좋다. 약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도와가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경쟁하는 대신 서로 공생하며 마음을 주고 받는 사이.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서로를 보듬어가며 하는 대화. 이런 대화의 힘은 강하다. 숨 쉴 틈을 마련해준다. 숨이 가빠올 때마다 나의 상처받은 폐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해주는 관계가 곁에 있다는 것만큼 큰 행운은 없을 것이다. 나는 소설에서 이런 행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물론, 잘 되진 않았지만.
바로 퇴고에 들어가는 대신 한 달간 소설에서 멀어져 있기로 했다. 한 달은 금방 지나 드디어 소설을 읽어보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금껏 수없이 읽었던 소설들을 떠올리며 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래, 객관적으로 봐보자. 이 소설 어떤가. 괜찮은가, 별론가. 흐음, 그래 확실히 별로다.
다시 읽어보니 인물들이 각자 겪고 있는 내적 갈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 갈등들이 풀려가는 과정 또한 어물쩍 넘어가기 일쑤였다. 나야 이 인물들을 만든 사람이니 얘네들이 왜 이렇게 고민하고 주저하는지 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볼 때엔 좀처럼 이해되지 않을 것 같았다. 중간에 구멍 또한 숭숭 뚫려있어 앞, 뒤 내용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앞으로가 먼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시 읽고 첫 순간엔 많이 실망했다. 그러다 아주 당연한 사실을 생각해냈다. 내가 읽은 글은 초고일 뿐이라는 걸. 초고로 무얼 알 수 있을까. 정유정 소설가는 인터뷰집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초고는 완성도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니, 초고에서 중요한 건 초고의 완성도가 아니라 초고를 완성했다는 사실일 뿐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될 것이다. 초고를 써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문장도 있다. 바버라 애버크롬비의 <작가의 시작>에 나오는 문장이다.
“초고를 끝마치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제는 기적을 다듬고 다듬어 읽을만한 소설로 만드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