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이 퇴고에 관해 하는 이야기를 듣는 일은 늘 즐겁다. 특히, 퇴고의 고통에 관해 하는 이야기가. 남의 고통이 나의 즐거움이 되는 순간인데, 이럴 땐 죄책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아직까지 퇴고가 너무 재미있어서 퇴고만 하며 살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는 본 적이 없는데(어딘가엔 있겠지!), 그 반대의 경우는 많이 봤다. 글쓰기가 즐겁지 않은 이유가 오로지 퇴고 때문이라고 말한 작가가 누구더라. 퇴고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더라도, 작가들이 그간의 기쁨과 즐거움과 좌절과 방황에 관해 털어놓는 이야기 속엔 분명 퇴고의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재미있고도 뛰어난 글을 읽을 때면 심술궂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작가는 이 글을 완성하는데 몇 번의 퇴고를 거쳤을까. 10번일까, 20번일까, 30번일까. 퇴고만 하는 데에 몇 년을 보냈는지 또한 궁금하다. 1년일까, 2년일까, 3년일까. 그래서 책을 읽다가 퇴고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오면 꼭 체크를 해놓는다. 나중에 마음이 허해질 때 초콜릿을 꺼내 먹듯 그들의 고통을 꺼내먹기 위해서. 그럼, 지금 그 중 몇 개만 꺼내먹어 볼까.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완성하기위해 8번이나 퇴고를 거쳤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 마지막 페이지를 서른아홉 번 고쳐 썼단다. 움베르토 에코는 한 페이지를 쓸 때마다 수십 번을 다시 쓴다고 했다. 소로는 <월든>을 일곱 번이나 고쳐 썼는데, 무려 8년에 걸쳐서였다. 이사벨 아옌데는 퇴고를 몇 번 하는지, 몇 년 동안 하는지 말해주는 대신 그저 자기는 지쳐서 더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글을 수정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제임스 조이스는 하루 종일 겨우 일곱 단어뿐이 쓰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퇴고를 하며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가 퇴고를 하면서 중점적으로 고민한 건, 과연 이 일곱 단어를 어떤 순서로 배치해야 하느냐였다.
<자전적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에서 메리 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고를 다듬는 작업의 마지막 20퍼센트에 내 노력의 95퍼센트를 기울이곤 한다. 전부 퇴고하는 데 들어가는 노력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발표한 모든 책은 단 한 쪽도 초고와 비슷하지 않다. 시 한 편을 60가지 버전으로 다시 쓰기도 했다. 나는 글을 잘 쓴다기보다는 고집스럽고 묵묵하게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는 작가다.”
나는 위의 말이 참 좋았다. 모든 진지한 작가들이 그들의 글에 얼마만큼 헌신하는지 이 문장에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퇴고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장 강화>에서 이태준은 이렇게 말했다.
“글은 심중엣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에 아주 이상적인 도구냐 하면 결코 그렇지 못하다.”
글은 심중엣 것을 표현하기에 그리 이상적인 도구가 아니기에 일필휘지로 뚝딱 써낸 글은 사실상 우리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퇴고가 있으니까. 우리가 퇴고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글이 심중엣 것과 가장 가깝게 표현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일주일에 거쳐 소설을 퇴고했다. 1분에 한 번씩 끙 소리를 내며 했다. 음식에 관해서라면 먹어 본 맛이 더 유혹적이라는데, 글에 관해서라면 읽어 본 글은 그리 유혹적이지 않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계속 읽어가며 문장 하나하나를 검토하는 일은 정말이지 지루하다. 심하게 지루하다. 그럼에도 꾹 참고 해야겠지.
그래도 퇴고를 진이 빠질 정도로 하진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어설프게 따라하는 중이다. 하루키는 퇴고를 할 때 너무 완벽하려 노력하진 않는다고 했다. 어차피 이번 퇴고가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이다. 퇴고는 계속 반복해서 해야 할 것이므로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아도 결국 어느 순간에는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오게 되리라고 하루키는 말했다. 하루키의 말을 따라 나도 조금은 슬렁슬렁 퇴고를 할 생각이다. 슬렁슬렁 반복하다보면 내 글도 점점 심중엣 것에 가까워지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