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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10. 2019

[드로잉 10일] 운동화 3.5켤레

우리의 남자 주인공은 지금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그에겐 아무래도 인간 혐오가 있는 듯하다. 겉으로는 착한 척하는 사람들. 하지만 막상 조금만 불편해지면 언제든 안면 몰수할 수 있는 사람들. 남자는 이런 사람들을 "역겹다."고 평한다. 하지만 곧 그는 지금 자기가 괜한 데다 화를 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사연 있는 남자처럼 보이는 우리의 남자 주인공은 오늘 내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 앵글은 다리 주위만 비춘다. 내 눈에 보이는 건 검정 바지를 입은 얇은 다리와 회색 운동화뿐이다. 운동화! 오늘은 운동화만 그리다가 시간을 다 보냈다. 운동화 3.5켤레. 


다른 건 뭐 쉽겠냐만은, 운동화 그리기도 참 어렵다. 무엇보다 운동화 끈이 문제다. 운동화 끈은 그 자체로 카오스다. 내 눈에는 그 어떤 체계도 없어 보이는 운동화 끈을 그리기 위해 손 끝에 힘을 줘보지만, 그냥 손만 아플 뿐이다. 그림을 그릴 땐 관찰력이 중요하다는데, 나는 아무리 그림을 들여다봐도 운동화 끈의 비밀을 찾지 못하겠다. 운동화 끈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이 나는가. 양 쪽 운동화 끈은 어디에서 만나서 어디에서 헤어지는가. 


결국 내가 그린 7개의 운동화는 모두 다른 운동화가 됐다. 모양도 다르고 운동화 끈을 묶는 방법도 다르다. 물론 크기도 다르다. 그림을 그리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운동화를 잘 그리는 사람들은 단지 관찰력이 좋은 건가, 아니면 과거 언젠가 한 번쯤은 운동화 끈의 비밀을 풀기 위해 자기 운동화를 품에 안고 스케치 연습을 해본 적 있는 건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 그러니까 운동화 같은 것. 연필이나 지우개, 스마트폰이나 커피 잔. 가방이나 책, 칫솔이나 치약 같은 것들. 그림 고수들은 이런 물건들을 그리고 또 그렸던 터라 이젠 물을 마시듯 쉽게 그릴 수 있는 걸까. 물어볼 길은 없지만 그들이 이런 물건들을 수도 없이 그려봤을 거라는데, 내 연필 한 자루를 걸고 싶다. 나는 오늘 보니 아무래도 관찰력은 전혀 없는 것 같으니,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냥 계속 그리다 보면 어떻게든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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