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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28. 2019

[드로잉 28일] 설지환과 독서

어제 지하철에서 글을 쓰면서 떠올린 이미지가 있었다. 설지환이 지하철에서 독서하는 모습. 설지환은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검블유' 속 인물이다. (검블유에서 그린 여성 서사가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렇다면 언제가 봐야지 하면서도 마지막 회가 끝날 때까지 보지 않았다. 판만 멋지게 벌여놨다가 뒤로갈수록 수습하지 못하는 (한국 드라마 특유의) 용두사미 대본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당한 적 여러번!), 난 한국 드라마를 볼 땐 그 어느 때보다 조심 또 조심한다. 그러다 어느 댓글을 보고는 봐도 되겠다 싶었다. 댓글은 이랬다.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완벽했다!". 오오, 이 정도의 댓글이 달리는 드라마라면 봐야지 싶어 스킵 기능을 활용하며 며칠 만에 마지막회까지 다 봤다.)


설지환은 서서브주연정도 되는 인물이다. 서브 여성 주연과 로맨스를 펼치는 남성 인물. 7회에 처음 등장해(실은 7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부터 드라마 속 드라마 인물로 등장하긴 한다. 아, 이 설정 너무 꿀잼이다!) 한 회당 5분 남짓 출연하면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난 뒤늦게 본 사람이므로 설지환의 인기가 얼마나 컸는지는 실시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인기를 끌었는지는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오늘 괄호를 왜 이렇게 많이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설지환이란 캐릭터는 우선 설정부터 무척 매력적이다. 10년차 무명 배우. 드디어 드라마 입성. 그런데 그 드라마가 아침 막장 드라마. 예순 셋 장모님이 전신 성형 끝에 서른 셋이 되어 전 사위(설지환이 연기하는 민혁이란 인물)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위가 재혼한 집으로 시집을 왔는데(고로 다시 사위의 장모가 된다), 사위가 장모를 꼬신다는 내용의 엄청난 막장 드라마에서, 설지환은 '개쓰레기'같은 인물을 연기한다. 미역 싸대기도 맞고, "난 여자도 패요."라는 극한 대사를 찰떡같은 톤으로 연기하며, 늘 험악한 인상으로 막을 쏟아내는 통에 시청자들의 미움을 받는 인물(나중엔 막장계의 아이돌로 거듭난다.).


그런데 '개쓰레기'같은 연기를 너무나 잘하는 연기력 왕 설지환 본인은 이 세상에 다신 없을 무해한 인물로 그려진다.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궁금할 정도로 건강하고 예의바른 성격에, 심지가 굳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소속사도 없고, 매니저도 없고, 힘도 없어 드라마 감독의 결정에 '찍' 소리도 못하는 입장이지만, 그는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이런 그의 긍정이 순진함으로 비춰지지 않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일(연기)만큼은 정말 탁월하게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기를 정말 잘한다. 평소엔 순딩순딩한 설지환이 민혁을 연기하는 장면에선 쾌감같은 게 느껴질 정도다.


설지환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나타내는 설정이 그의 2G폰이다. 설지환은 2G폰을 들고 다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전화는 전화인게 좋고, 티비는 티비인게 좋고, 컴퓨터는 컴퓨터인게 좋아요. 안 섞었으면 좋겠어요. 왜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설지환은 이렇게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전했으리라. 자기는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겠다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그의 성향은 옷차림에서도 드러난다. 엄청나게 긴 티셔츠에 바지(힙합 스타일 아님). 트렌드함과는 거리가 먼 그의 복장에서도 그가 무얼 신경쓰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또 그걸 신경쓰지 않음으로 인해 무얼 신경쓰며 사는지 말해준다.


드라마가 설지환의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한 도구에는 책도 있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설지환. 모두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데 설지환은 책을 들고 있다. 사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아, 이렇게까지 된 건가' 싶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향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독서가 이 시대에 이렇게나 희소한 행위가 된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그가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과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 내게도 다른 사람이다.


2G폰, 트렌디하지 않은 복장, 독서. 이런 설정들을 지닌 설지환이란 인물 조금 과하게 해석하자면 현대판 소로 정도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19세기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직접 통나무집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 자연과 동물과 채식을 벗삼아 살아가야 했다면, 21세기엔 2G폰을 들고, 유행에 무관한 옷을 입으며, 존엄함에 관해 말하는 책을 읽으면 된다는 것. 설지환은 이런 '세 가지 특수 설정'을 등에 업은 채 마치 물에도 순한 물이 있다면 순한 물처럼 유유히 이 복잡한 서울 거리를 흘러다닌다. 그러면서 그는 화를 내도 무방할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당황하거나 조급해야 할 상황에서도 여유를 찾을 줄 알며,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기다릴 줄 알고, 아니다 싶으면 뒤돌아서며, 뒤돌아설 때도 끝까지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다. 멋진 캐릭터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책 읽는 설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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