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 투사, 해리, 억압, 주지화, 행동화, 동일시, 전치
스타트업에서 일하다 보면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성적이지만 돌직구로 타인을 상처 입히는 사람, 소심하고 말수도 적지만 어쩌다 뱉은 한 마디가 팀에 큰 도움을 주는 사람, 말도 많고 외향적이지만 속은 상처 투성이인 사람, 모든 면이 꽉 막혀 도무지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 이처럼 우리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매일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고백하자면 조금이라도 저를 힘들게 하는 상대가 있다면 쉽게 일상에서 배제해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사람들을 매니징 하는 입장이 돼보니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질이 일의 완성도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저자세일 때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측면으로 작용합니다. 맹목적으로 타인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단계임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료들의 행동이 잘 이해가지 않을 때 심리학의 방어기제를 상기하곤 합니다. 방어기제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심리적 작용이며, 불쾌한 감정을 인식하고 그 스트레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자주 사용하는 방어기제가 다릅니다. 때문에 유형을 파악해두면 "아 저 사람은 저런 상황에서는 주로 '부정'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구나"같은 이해의 체계가 마련됩니다. 이를 통해 100%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타인의 성격을 파악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8가지 방어기제를 살펴보며 자신을 갉아먹지 않고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탐색해볼 예정입니다. 방어기제는 두 가지 이상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미리 알아두면 좋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암 판정 사실을 듣고, 오진일 거라고 우기는 경우가 부정에 해당합니다. 부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모든 사실을 부정해 완벽히 차단하는 경우
사실은 받아들이지만 그것의 영향은 외면하는 경우
사실과 영향 모두 받아들이지만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중 모든 사실을 완벽히 차단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대신 두, 세 번째 경우는 자주 만났습니다. 사실은 인식하지만 영향을 외면하는 경우는 주로 결정권한이나 문제를 직접 해결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곤 합니다. 이런 경우는 다그치는 것보다 그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고 기여할 수 있는 부분에 관해 먼저 제안할 때 조금 더 나은 관계가 형성된 경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든 사실관계를 다 받아들이지만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는 조금 더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팀이 만든 서비스는 훌륭한데 타 부서인 마케팅팀이 일을 잘 못해서 홍보가 안된 거야' 같은 경우가 떠오르네요. 이럴 경우 회고 미팅 등을 통해 책임 이전의 문제를 일으킨 근본 원인에 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어떨까요.
스스로 인정하기 힘든 욕구나 충동의 원인을 타인이나 외부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싫은 감정이 드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먼저 상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투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나도 그 사람을 싫어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때문에 내가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죠. 이때 타인이 나를 먼저 싫어하는 것으로 상정해버림으로써 내 마음의 짐을 쉽게 덜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투사는 잘 활용하면 나를 성숙시킬 수 있는 좋은 방어기제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투사하면 타인으로부터 내 단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 A는 저 순간에 꼭 기분 나쁘게 이야기할까. 음, 생각해보니까 나도 며칠 전에 저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상대방이 상처받았겠다... 앞으로 하지 말아야지"
해리는 쉽게 말해 이중인격을 뜻합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해리를 상징하는 유명한 영화이기도 하죠. 병적인 수준의 해리는 자신 안에 둘 이상의 정체성을 지닌 인격이 존재한다고 믿는 다중인격장애(해리성 정체성 장애)등을 포함하는데 주제와는 맞지 않으니 넘어가겠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약한 해리 증세들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는 따분할 때 갑자기 공상에 빠져서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는 '백일몽'같은 것들이 해당됩니다. 이처럼 현실감각이 상실되는 느낌이 든다면, 너무 염려하지 말고 최근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 없는지부터 파악하면 좋습니다.
억압은 버티기 힘든 감정이나 생각 등을 무의식으로 흘려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교통사고 같은 큰 사건을 당한 뒤 정확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억압 심리입니다. 현실에서는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상사에게 대들고 싶은 마음을 억압하는 것도 해당합니다.
저는 몇 년 전 과도하게 순응적인 성향의 한 디자이너를 매니징 한 적이 있습니다. 얼굴이 희고 말수가 적고 모난 곳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의를 할 때도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회의 도중 갑자기 표정을 엄청 찡그린다거나 티가 나게 단답형 대답을 하는 등 의외의 곳에서 이상한 태도가 표출되곤 했습니다.
저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 디자이너와 몇 차례 1on1을 진행했습니다. 과정에서 주니어 시절 상사로부터 많은 억압을 당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니어 시기를 벗어나도 타인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내는 것이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억압은 이처럼 개인이 힘이 없고 수직적이거나 폭력적인 구조에 놓여있을 때 생기기 쉬운 방어기제입니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면 쉽지 않겠지만 스스로 최소한의 기준점을 마련해놓고, 타인이 그 선을 넘을 경우 내 상태나 감정에 관해 솔직히 털어놓는 편이 낫습니다. 말을 해서 무언가 바뀌지 않더라도, 상황을 언어화해보려는 노력 자체가 무척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을 잊기 위해 지식으로 상황을 이해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의사에게 암이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병의 원인이나 증상에 대한 지식에 몰두하는 것이 해당합니다. 어찌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낙담하지 않고 문제에 집착하는 주지화에서 긍정성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어려운 순간에서 충분히 느끼고 지나가야 할 슬픔이나 낙담 같은 감정들을 인위적으로 억누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만 대처하는 것은 부작용을 낳습니다. 지식이 자신의 불안감을 완벽히 없애줄 거라고 착각하는 순간입니다. 주지화는 주로 교육 수준이 높고 지적인 사람에게서 잘 나타나기 때문에 스타트업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방어기제입니다.
충동이 들 때 억제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행동화는 주로 폭력적인 형태로 많이 나타납니다. 내부의 충동이 반사적인 행동으로 표현될 때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느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 행동화는 주로 어린아이들이 쓰는 스트레스 해소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불만을 표현할 길이 없는 아이들은 울고, 떼쓰는 것 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아기 때의 방어기제인 행동화는 어른이 되어서는 주로 '짜증'으로 발현됩니다. 내 옆 사람이 습관적으로 짜증을 낸다면 방어기제로 행동화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그 상황을 다 받아줄 필요가 없습니다. 저 사람은 유아적인 습성이 아직 많이 남아있구나라고 넘기면 됩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을 닮아감으로써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방어기제를 말합니다. 회사의 선임이나 대표에게 반대의견을 내면서 긴장감을 높이는 것보다 그들과 동화되며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심리적인 전략입니다. 이때 지나친 의존을 통한 동일시는 나를 희미하게 만들기 때문에 주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동일시는 잘 활용하면 건강한 방어기제이기도 합니다. 동일시를 통해 내가 부족한 부분들을 타인의 행동이나 가치관을 통해 채워나가는 것이죠. 오히려 적절한 대상을 통한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 성장이 지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기에 맞는 적절한 동일시 대상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더불어 동일시가 없이는 타인과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공감대 형성이 되고 있다면 서로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단계입니다.
자신보다 강한 대상에게 품었던 감정을 힘이 약한 대상에게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힘이 약한 대상은 안전하고 덜 위협적입니다. 이때 자신이 가졌던 불쾌한 감정들을 배출합니다. 전치는 가정불화나 아동학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만나는 전치는 상사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후임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치를 겪는 사람은 억압으로 연결될 수 있으니 너무 심할 경우 선을 긋고 내 상황과 감정에 대해 적절히 언어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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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방어기제를 부정적인 맥락에서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방어기제가 너무 강한 것 같아'처럼 말이죠. 하지만 현실에 방어기제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방어기제는 자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생존 본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저만해도 부정이나 주지화 같은 방어기제를 일상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참고로 퇴행이나 유머, 승화같이 이 글에 소개하지 않은 방어기제가 아직 많습니다. 사실 모든 방어기제를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어기제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가요? 갑자기 내 옆자리 빌런이 어제보다 조금은 더 괜찮아 보이지 않나요?
'8가지 방어기제로 스타트업 빌런 이해하기' 끝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