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피셜과의 끝없는 투쟁기
이 글은 회사 MVP를 만들며 기록한 TIL(Today I Learned)을 엮은 글입니다. 회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제가 속한 조직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음을 미리 밝힙니다. 효과적인 1 pager 만들기 시리즈의 첫 편이 될 예정입니다 :)
디자이너에서 프로덕트 오너가 된 후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논리를 보여주는 형식인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 시절에는 시각화에 대한 의존도가 강했다면 프로덕트 오너가 된 후부터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1 pager 같은 문서 활용 빈도가 무척 높아졌습니다. 다만 제가 적은 글은 c-level, 디자이너, 마케터, 개발자, 사업 개발팀 등 예전과 달리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공유되기 때문에 핵심 메시지가 오해되지 않게 항상 주의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읽는 사람의 시간을 고려해 가급적 스크롤 없이 뷰포트 안에서 핵심 내용을 소화하고 상대방이 다음 액션을 고민하지 않게 하는 것도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드니 글을 유려하게 쓰는 것보다는 추측이나 가정을 빼고 전체 길이를 더 짧게 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뇌피셜은 여전히 극복하기 힘든 존재인 것 같습니다.
1 pager가 근사한 요리라면 '관찰'은 재료에 해당합니다. 재료 상태가 좋지 않다면 요리의 결과 역시 참담할 것입니다. 실무를 하다 문득 '관찰'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궁금해진 적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실무에서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쓰는 걸까 하는 생각이죠. 관찰에 관한 다양한 검색 결과가 나왔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래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관찰: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가지는 변화나 형태를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저는 위 문장에서 '객관적이고 명확하게'가 여전히 힘듭니다. 주관적 해석 없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고 숙련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수면 관련 프로덕트 MVP를 팀과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몇 달 전 일주일 가량 수면에 관심 있는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과정에서 관찰한 것들을 뽑아 팀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 관찰에는 가정과 추측이 잔뜩 들어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부끄럽지만 제 개인 노션에 있는 TIL들입니다. Q에 해당하는 질문자가 저이고 인터뷰이와 나눈 토막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보안상 인터뷰이의 이름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Q. 김수면 님은 수면에 어떤 문제가 있으신가요?
A. 긴 통근시간이 수면 시간 부족으로 이어져 피곤합니다. 평일 기준 5시간, 적으면 3~4시간 수면을 합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최적의 수면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수면을 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수면 측정 어플을 사용해봤습니다.
당시 했던 틀린 관찰
- 통근 시간이 길면 수면 시간 부족으로 연결된다. (x)
위 제 관찰은 긴 통근 시간과 수면 시간 부족을 성급히 연결해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김수면 님의 수면 시간 부족은 사실 긴 통근 시간 외에도 다양한 변수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후에 인터뷰이가 자기 계발 의지가 무척 강하고, 퇴근 후 하고 싶은 일들을 위해 시간을 많이 쏟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만약 수면 시간 부족이 가장 큰 문제라면 퇴근 후 활동 시간을 줄여보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인터뷰이중 김수면 님과 비슷한 통근시간(왕복 4시간)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분은 환승 없이 한 번에 회사에 도착하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부족한 잠을 메꾼다는 답변을 주기도 했습니다. 통근 시간이 같아도 환승 유무나 횟수가 수면 시간에 다른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다른 분과의 인터뷰 토막입니다.
Q. 박슬립님은 왜 수면을 관리하고 싶으신가요?
A. 네 저는 수면 자체를 관리하고 싶다기보다는 시간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요. 아마도 시간 관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수면의 질에 당연히 관심이 있을 것 같아요. 저희 회사 임원 분들도 하나같이 조금 자고 덜 피곤하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했던 틀린 관찰
- 수면의 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시간 관리에 관심이 많다. (x)
수면의 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시간 관리에 관심이 많다는 관찰도 이후 인터뷰를 거듭하며 수정된 내용 중 하나입니다. 잠자는 것 자체를 잘 즐기기 위해 아로마를 피우거나 취향에 맞는 ASMR을 틀지만 낮 시간 관리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도 존재했고, 심리적인 문제로 인해 수면의 질 자체를 의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존재했습니다. 이를 통해 '수면의 질에 관심 있는 사람'중에도 다양한 분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터뷰를 통해 실감하게 됐습니다. 다음은 방향성 설정에 도움이 된 인터뷰 관찰입니다.
관찰 1) 인터뷰에 참여한 여성 인터뷰이 8명 중 6명이 수면 측정을 위한 워치 착용에서 손목 통증을 느낌.
관찰 2) 인터뷰이 20명 중 17명이 수면 문제 해결을 해주는 진료과를 알지 못함.
도움이 된 이유를 돌아보면 첫 번째의 경우 제 주관적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숫자 때문이었고, 두 번째의 경우 실제로 수면 문제는 정신건강의학과, 수면클리닉, 신경과, 이비인후과, 내과, 소아청소년과, 치과 등 매우 다양한 진료과에서 다루고 있는 분야였기 때문입니다. 2번 관찰을 문제 정의(Problem Statement)와 연결시켜 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관찰 2) 인터뷰이 20명 중 17명이 수면 문제 해결을 해주는 진료과를 알지 못함.
문제 정의) 자신의 수면 문제와 연관 있는 진료과의 검색을 포기한다.
관찰에서 주관이 자꾸 개입해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관찰자가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휴리스틱 이론 중 '대표성 휴리스틱'(Representative heuristics)과 연결 지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는 실제 확률에 대한 판단은 배제한 채 대상이 의미하는 대표성을 갖고 어림짐작해 범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위에서 예시로 든 잘못된 관찰 예시인 '통근 시간이 길면 수면 시간 부족으로 연결된다'는 제 머릿속에 빠르게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통근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조는 양복 입은 회사원의 이미지 같은 거죠. 제 머릿속에 그 상징은 수면 시간이 충분하지 않게 분류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타투가 많은 사람, 긴 머리 남성, 아주 짧은 숏컷의 여성, 각종 직업이 만들어낸 이미지, 특정 국가 사람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징은 잘못된 관찰과 연결될 수 있으니 주의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대표성 휴리스틱보다 더 무서운 게 있습니다. 바로 개인적 경험과 기억으로 판단하는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s)'입니다. 과거 주니어 시절 컴퓨터 바탕화면에 폴더가 하나도 없이 파일이 마구 흩뿌려진 선임이 있었습니다. 그 선임은 자신의 논리를 잘 설득하지 못해 항상 팀장님께 혼이 났습니다. 저는 과거의 이 경험이 잔상으로 남아 바탕화면에 파일이 어지럽게 나열된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왠지 논리가 약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착각이 깨진 적이 있어요. 바탕화면 파일 정리는 안되어있지만 누군가를 멋지게 설득시킨 사람을 본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와요. 바탕화면 파일 정리와 그 사람의 논리력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데 말입니다.
* 이 글은 ‘좋은 1 pager의 조건: 관찰을 기반으로 한 문제정의’로 이어집니다.
'좋은 1 pager의 시작: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끝)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