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사회적 역할?
서재에 앉아 오래되고 먼지 쌓인 디자인 책들을 뒤지다 우연히 반가운 책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20년 넘게 디자인 표준 교과서로 쓰인 디자인 비평서인 나이젤 화이틀리의 '사회를 위한 디자인'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이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디자인을 업으로 삼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추억이 많은 책입니다.
이 책은 디자이너를 단순히 기업의 이윤을 위한 역할로 보지 않고,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로 봅니다. 특히 경제, 정치, 생태, 사회, 문화적 영역과의 연결을 통해 디자이너의 가능성을 재조명합니다.
1993년 첫 출간된 이 책은 현재와는 시대적 결에서 약간 맞지 않거나 이제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디자인이 물리적인 제품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반영하고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사실은 시대를 넘어선 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책은 얼핏 디자인을 자체를 반대하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이 책이 비판하는 대상이 '잘 팔리는 디자인=굿 디자인'이라고 생각해 온 주류 디자인이기 때문입니다. 저한테 사회를 위한 디자인은 오늘날 '굿 디자인'이 어떻게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기나긴 주석처럼 읽혔습니다.
그리고 디자인 전체가 아닌 소비주의 디자인을 반대하며 오히려 디자인이 사회에 유용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는 점에서 이 책은 친디자인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이 곧잘 논의하는 것은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 소비자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 즉 성공한 제품이나 서비스는 그것을 구입하는 사람을 만족시키고 또 그것이 이윤을 보장하기 때문에, 그 기업을 만족시키게 된다는 식의 내용이다. 이것은 도덕관념이 없는 디자이너의 설득력 없는 주장으로서,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면서도 이 욕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사회적으로 득이 되는지, 자원이 소모되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사회를 위한 디자인 본문 중)
디자이너로 현업에 있다 보면 알리고 파는 것 자체에서 이미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내가 만들고 있는 제품이나 혹은 기능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지까지 고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현재보다 더 복잡한 윤리적 의제들이 등장할 근 미래에는 기능과 성능을 극대화하면서도 환경과 사회적 책임감을 어떻게든 놓지 않는 디자이너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린 디자인'처럼 표면적으로는 윤리적이고 옳은 것처럼 보이는 디자인에 대해서 다시 볼 것을 제안합니다. 환경을 생각하며 제품을 소비하는 것은 일종의 라이프스타일로서 패션처럼 소비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례로 패스트푸드 포장지를 플라스틱재에서 종이로 바꾼 것은 환경적으로 올바르게 보이지만 생산에 드는 에너지 및 폐기 비용에 있어서는 친환경적이지 않은 점등입니다. 이 같이 그린 디자인이 이미지 혹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소비될 수 있는 점은 지금도 다시 환기해 볼 만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책은 일방향적으로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소비자들이 사려 깊은 디자인을 사용하며 의식적인 각성을 하고, 다시 기업과 디자이너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는 선순환 구조가 디자인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케팅 주도 디자인을 디자이너의 힘만으로 바로잡는 것은 무척 힘들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국내 뛰어난 디자인 실무자들의 대중 강연이 더 많아질 필요성을 느낀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역할이 어떻게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레퍼런스를 담고 있습니다. 나온 지 오래된 책이지만 인공지능 시대로 진입하는 현재 근미래 디자이너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힌트를 많이 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논의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현재 절판이긴 하지만 중고로 구해서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사회를 위한 디자인' 책 리뷰 (끝)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