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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 Sep 24. 2018

쇼코의 미소/최은영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줄거리


쇼코에게는 할아버지가 있고, 소유한테도 할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둘 모두 각자의 할아버지를 증오한다.

자매결연한 학교에서 지방도시 K를 방문하게 된  쇼코는 소유네 집에서 머물게 되고 

쇼코와 할아버지는 일본어로, 소유와 쇼코는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평소 괴팍하고 가족에게 무관심하던 할아버지가 쇼코에게만은 살갑게 대하며 쇼코가 돌아가고 나서도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받는다.

도쿄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편지를 끝으로 할아버지, 소유 모두와 연락이 끊어진다.

서른 살이 된 소유는 서울에서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여의치 않고 어느 비 오는 날 할아버지가 소유의 작은 방으로 찾아오게 되고 소유는 쇼코를 만나기 위해 10년 전 편지를 보내온 주소로 찾아가게 된다.


첫 문장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었다.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서도 밀려나서. 역시나 대양에서 밀려난 바다의 가장자리를 만나는 기분이라고. 외톨이들끼리 만나서 발가락이나 적시는 그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했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장면들

“처음 교실에서 쇼코가 수줍어하는 표정을 봤을 때처럼 나는 쇼코의 웃음에서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쇼코는 정말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라. 공감을 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라, 그냥 상대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포즈를 취하는 것 같았다.”

쇼코는 남을, 특히나 할아버지를  배려하는데 익숙한 아이인 것 같다. 그래서 소유의 할아버지와 더 잘 맞았는지도 모른다.

“쇼코는 나보다 할아버지와 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았다. 나와는 영어로 대화해야 해서 많은 부분이 통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와는 일본어로 할 수 있어서  모든 말이 다 통했다.

할아버지는 쇼코에게 자신을 ‘미스터 김’이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쇼코와는 친구가 되고 싶다고, 다 늙은 교장선생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면서”

할아버지는 평소에는 말이 없다. 가족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말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완전한 타인에게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배운 일본어로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나는 노인들 특유의 이상한 외로움을 쇼코에게서 느꼈다. 나는 쇼코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쇼코는 노인이었다.”

소유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다. 최은영 작가도 <쇼코의 미소>로 등단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공모전에서 낙선하며 꽤 공백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불안이 작품에도 녹아 있는 듯하다.  나도 비슷한 처지이기에 공감 가는 것 아닐까? 적어도 남을 깎아서 내 무너진 자존감을 세우려고는 하지 말아야겠다. 그냥 선택한 길이 다를 뿐이고 정 힘들다면 도움을 청하면 그만이다.

“이미 직장에서 대리급이 된 친구들과는 돈 씀씀이가 확연히 달라졌고 그 애들은 내가 밥값도 내지 못하게 했다.”

“반면 영화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늘 그들의 재능과 나의 재능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휩싸였다. 영감은 고갈되었고 매일매일 괴물 같은 자의식만 몸집을 키웠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알코올 중독자가 된 감독 지망생과,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패스트 푸드점에서 일하며 야근 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을 보며 내가 그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지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나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잃어갔다. 

기다려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내 자의식은 그 친구들마저도 단죄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를 이해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끔찍함에 놀랐으나 그 조차 오래가지는 못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에서 여러 번 할아버지답지 않다는 말을 썼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 부분일 뿐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져도 나는 그의 삶의 5분의 3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조차도 이해 못하는데 말이다.



출처: 

http://movingcastle.tistory.com/21

 [see the uns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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