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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 Sep 25. 2018

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경험하는 것에 돈을 아끼는 편이 아니라 책을 사는데도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었지만 오프라인 서점에서 새책을 사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나마도 당장 도움이 되는 경제/경영서 혹은 엑셀/어학 등 실용서들이 대부분이었다. 소설이나 철학책처럼 장기적으로는 도움되는 역시나 읽고 싶은 책들은 많은 경우에 구매 의사결정의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보통은 중고책 서점에서 많이 사서 보았다. 회사에서 도서비를 지원해주면서  덕분에 경제/경영서뿐만 아니라 교양 이서나 에세이 소설 등 당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새책들을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며 감성이 더 풍부해지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면 어떤 형태 로건 회사에도 언젠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읽어왔던 소설들의  저자들은 대부분 나보다 적게는 15살 많게는 20살 이상 많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작품이 많았다. 그만큼 보편타당함, 세월을 견뎌내며 검증된 좋은 작품이라는 말도 되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감하기 어려운 시간의 간극이 느껴지곤 했다.

한국에서 자라난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84년 생, 첫 등단작인 <쇼소>를 통해 데뷔하자마자 각종 상을 휩쓸며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등단하기까지의 우여곡절과 고민들을 전혀 다른 산업의 종사하는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과 크게 다르지 않아 더더욱 마음이 갔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평소에는 외면하고 지내던 아픈 것들과 자주 마주치게 되어 불편하다.

일상은 충분히 내 마음과 관계를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바쁘다.

그래서 불편한 내면의 것들은 보통 들춰지지 않고 계속 유예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은 복리가 쌓여 고지서가 되어 날아오기 마련이다.


감정의 부채를 조금씩 청산하고 싶다면 다소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읽는 것을 추천.


모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말을 했다. 잡티도 별로 없는 깨끗한 얼굴에 그만큼이나 깨끗한 표정이 어렸다. 어떤 망설임도 불안도 없는 얼굴. 내가 가질 수 없는 얼굴. 내 눈에 모래는 의사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똑똑한 동생을 둔, 동네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의 가장 넓은 평수에 사는 온실 속 화초였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용돈을 받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모래가 조금이라도 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 애를 속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마음을 위호라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래는 자신의 환경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았다. 지하상가에서 산 삼천 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편의점에서 파는 로션을 발랐다. 그런데도 그 애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태가 났다. 그 애의 넉넉함은 물질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 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그 관대함은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비싼 자동차나 좋은 집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연애 혹은 결혼을 한다면 꼭 원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누군가는 꼭 '집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 역시도 사랑 많이 받고 여유롭게 자란 친구들의 그 특유의 관대함이 부럽고 자연스러운 겸손함과 예의가 부럽다. 태어날 때부터 피부색과 국적을 스스로 정할 수 없듯 사랑이 많은 화목하고 여유로운 가정에 태어나는 것과 풍파가 많고 척박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것이 비록 타고나는 것은 운명이고 그 이후는 노력일지라도 말이다.



작가의 말  역시도 불편했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있다. 쉽게 다루어지고, 함부로 이용될 수 있는 어린 몸과 마음에 대해 나는 이 글들을 쓰며 오래 생각했다. 어린아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고독을, 한량없는 슬픔과 외로움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 어른이 된 우리 모두는 그 시간을 지나왔다.


나는 한때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운동장 조회 시간에 일렬로 신발주머니의 줄을 맞추고, 친구들이 일사병으로 하나둘 쓰러져 나가도 부동자세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아이, 수련회에 가서 유사 군사훈련을 받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여자로서 순결을 지키며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 다나까'로 말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던 아이.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개인행동이었다. 그 반듯한 줄을 탈출해서 멀리로 달려 나가고 싶었다. 운동장에 줄을 선 신발주머니들로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로부터, 야, 너 51번 , 차렷, 열중 쉬어, 앞으로나란히, 앉아, 일어서, 앞으로 나와, 싹수없는 년, 너희 부모가 돈이 없어서 이런 동네에 살지, 뭐, 너 같은 게 뭐가 되겠어? 지껄이는 입들과 너무 가벼운 손찌검들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로 가고 싶었다. 개인행동을 하고 싶었다. 나의 개인행동은 아무도 해치지 않으리라 믿었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몸으로 느꼈으니까. 그러나 그랬을까, 내가.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오래도록 나는 그 사실을 곱씹었다. 의도의 유무를 떠나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 때때로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무심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 나. 내 마음이라고, 내 자유랍시고 쓴 글로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웠다. 어떤 글도, 어떤 예술도 사람보다 앞설 순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지닌 어떤 무디고 어리석은 점으로 인해 사람을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겁이 났다.


나쁜 어른, 나쁜 작가가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쉽게 말고 어렵게, 편하게 말고 불편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느끼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지난 사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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