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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E Jul 23. 2021

나는 안 아파야 한다.

할머니 앞에선 아프면 안 돼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잔병이 많았다. 감기는 환절기마다 초봄, 늦가을 매년 두 번씩 꼬박꼬박 걸렸고, 배앓이며 치과며 자주 다녀서 나한테 들어간 병원비만 빌딩 한 채 값이라고 할 정도로 많이 다녔다.

어릴 때 살던 곳이 시골이라, 병원은 없었고 마을에 보건소 한 개만 있어서 보건소에서 진료가 안 되는 치과나 피부과 등등은 읍내로 나가야 했는데, 할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30분 넘게 차를 타고 가야 겨우 읍내의 입구가 있을 정도로 먼 곳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플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하셨다. 감기라도 걸렸으면 화를 내시며 왜 아프냐, 뭐하러 감기 걸려서 왔냐 등등 격하게 화를 내셨는데, 다 아픈 게 걱정돼서 속상하신 거라는 것을 안다. 항상 격하게 걱정하셔서 그렇지..

할머니는 30년 전, 내가 아주 어릴 때에도 배탈에 좋다며 매실청을 진하게 만들어서 부엌에 숨겨두시고는 내가 배앓이할 때마다 한 스푼씩 원액을 주셨는데 신기하게 그걸 먹으면 아픈 배가 금방 나았다.

어릴 때부터 아프면 할머니가 속상해하시고 화를 내셨던 게 생각나서, 난 아픔을 숨기고 사는 어른이 되었는데, 그렇게 병을 키워서 할머니께 더 혼나는 경우도 많았다.

아니 아파도 혼나고 아프다고 말 안 했다고 혼나면 나는 대체 어찌해야 할까. 그렇지, 건강해야지만 혼이 안 난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등의 꽤 넓은 면적에 까맣게 색소침착이 되었는데, 피부과에선 2~30대 여성들에게 흔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에겐 통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매일매일 저녁마다 안경을 끼고 내 등을 보시면서 경과를 살피셨고, 매일 세심히 연고를 발라주셨다. 그렇게 몇 년을 주말마다 피부과를 가고, 매일 연고를 바르니 어느 순간부터 옅어지더니 없어졌다.

내가 독립하고 난 후에도 아픈 일이 제법 많았지만, 할머니께는 티를 안 내려고 애썼다. 아파서 쉬어도 항상 퇴근시간 되면 퇴근했다고 전화를 걸고, 아픈 거 티 안 내려 한껏 텐션을 높여서 평소와 다름없이 통화를 한다.


"할무니~ 나 퇴근해따"

"... 목소리가 왜 그래!"

"목소리? 멀쩡한디?"

"머시 그래! 아프구만! "


들켰다.

목소리 한마디 듣고 아픈 걸 들켜버렸다.

할머니가 꿰뚫어 보시는 건 내 위장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몸이 안 좋다, 어디가 아프다 하면 할머니는 그때부터 나을 수 있는 온갖 방법과 앞으로 안 아플 원인까지 고민하시는데, 감기에 걸리면 한동안은 계속 홍삼을 먹으라며 홍삼 살 때까지 매일 말씀하시고, 위염이나 장염이 생기면 프로바이오틱스가 좋다며 아예 제일 큰 약국에서 제일 좋은 거 한 박스를 사 오셔서 주시면서 매일 먹으라고 당부를 하셨다.

사람이 어떻게 안 아플 수 있겠냐마는, 할머니는 내가 아프면 세상이 무너진 듯 걱정을 하신다.



몇 년 전 주말에 할머니 집에서 자다가 새벽에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가만히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세상이 빙빙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고, 어지러움에 구토까지 했다.

할머니는 주무시다가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셨는데, 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괜찮다고, 병원 가서 약 지어 오겠다고 나가서 택시를 불러서 근처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서도 누워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말도 못 하고 누워서 빈속에 위액만 토하고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은 술 마신 건지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물으셨지만 난 대답하지 못하고 누워서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

그렇게 20분쯤 지났을까..

할머니가 계신 게 아닌가!

새벽에 갑자기 병원 간다고 나간 손녀가 많이 아픈 게 분명 하니 이 시간에 열었을 응급실을 찾아온 것이다.

어디 병원 간다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무작정 가장 가까운 병원부터 새벽에 걸어서 찾아오셨다.

할머니를 보고 난 강박관념이 일어났다.

괜찮다고, 많이 아픈 거 아니라고 얘기해야 한다.

아무 말 못 하고 있으면 분명 할머니는 큰 병인 줄 알고 어쩔 줄 몰라하시며 울고만 계실 것이다.

"어... 지.. 러... 요..."

정신을 꼭 부여잡고 이 한마디만 겨우 남긴 채 난 다시 어지러움에 몸부림쳤다. 간호사분들은 옆에서 휴지와 종이타월을 가져다주시며 내 입과 주변을 닦아주셨고, 할머니는 내가 수액을 맞으며 안정될 때까지 옆에 꼭 붙어서 날 쓰다듬어 주시고 닦아주셨다.

그 새벽에 얼마나 놀라셨을까.

다행히 입원하지 않고 수액 맞고 약을 지어 왔지만, 할머니는 한동안 동네 어르신들께 어디 병원이 좋은지 수소문하셔서 나에게 매일 알려주셨다.

그래서 할머니 앞에선 절대 아픈 티를 내지 않고 꽁꽁 숨긴다.

어차피 약 먹으면 나을 병, 뭐하러 할머니 걱정을 만들까.

할머니 앞에서의 나는 항상 안 아프고 건강한 손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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