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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E Jul 15. 2021

눈이 오면 생각날 거야

아주 쉬운 일



직장생활 한지 몇 년이 지났을까.

내 나이 서른이 되자, 나는 독립을 했다.

첫째 이유는 출퇴근길이 너무나 열악하여 이 좁은 광주 바닥에서 수많은 버스가 나만 피해 가는 듯 편도로 한 시간 반이 걸린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나이가 찼으니 이제 독립해라. 하는 어른들의 말씀이었다.

솔직히 30년을 같이 살았으니 나도 독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입속에 있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 나가지 말라는 말.

어린 손녀 애기 때부터 부모 대신해서 키워오셨는데 오죽하실까.

흉흉한 세상 여자 혼자서 어찌 지키며 살까, 나쁜 사람 만나면 어쩌나 뉴스에 나오는 사건사고들 보며 우리 애기가 당하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그래서 온 식구들이 내 독립 하우스를 찾는데 아주 꼼꼼히 봤고, 출퇴근길과 보안, CCTV 등이 철저한지 등등을 세심히 살핀 결과, 회의 사님이시라는 선한 초등학교 교사 부부의 원룸 건물에서 살게 되었다. 입구 CCTV, 주인집은 꼭대기층으로 같은 건물에 살고 있고, 법적으로 문제 될 것 없는 좋은 집이었다.

내가 독립을 한 후로 할머니는 내가 언제 퇴근하나, 노심초사하셨고, 난 매일 퇴근 후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할무니! 나 퇴근해따!

오야 언능 가서 쉬어라 뭐 먹을 거 있냐

웅! 시장에서 사 왔어! 우리 감자는 뭐해?

뭐하긴 뭐해야. 자고있제


두세 마디 정도로 끝나는, 짤막한 통화였다.

감자는 할머니가 키우시는 강아지로, 할머니를 닮았는지 퉁실한 몸에 하루 종일 잠만 자는, 노인네 같은 차분한 성격의 강아지다. 할머니가 매일 새벽 산책 나가시는데, 동네분들이 할머랑 똑같이 생겼다고 할머니가 낳으셨냐는 농담을 심심치 않게 들으신다.

매일 할머니와 나누는 퇴근 후 통화는, 기승전 감자로 끝난다.

그리고 난 언젠가부터 눈 오고 비 오면 할머니를 불러서 창밖을 보시게 했는데, 그럴 때마다 좋냐며 아직 애기라며 말씀하셨다.

지금도 눈 오는 걸 보면 할머니께 전화를 한다.

언젠가는 아침에 출근길에 눈이 오길래 바로 할머니한테 전화를 해서 할머니! 눈 와! 했더니, 할머니가 이 시간에 전화 왔길래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다며 깜짝 놀라셨다며 욕을 한자리하시더니 금세 눈 오니까 좋냐며 평상시와 똑같은 대답을 하셨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난 날씨의 변화가 좋다.

눈 오면 예뻐서 좋고, 비 오면 공기가 개운해져서 좋고.

그리고 이참에 할머니께 전화해서 놀라게 해 드리며 장난치는 것도 즐겁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할머니한테 전화를 하면, 할머니도 웃으시며 꼭 뭐 먹었냐며 물어오신다.

점점 시간이 가면서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실 때까지의 시간이 길어졌는데, 다리 아프셔서 전화받으러 가는 길이 구만리라고 하신다. 점점 관절이 제 할 일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화를 할 땐 최대한 연결음을 다 듣고, 못 받으셨을까 한번 더 걸어본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손녀 전화를 못 받으셨으면 얼마나 속상하실꼬 하는 생각에 말이다.

할머니는 자식이며 손자 손녀 많지만, 온 식구 들은 내가 할머니의 진 손주라고 한다.

모두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픈 자식이지만, 나는 안 깨물어도 아픈, 항상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런 자식.

그리고 솔직히 나만큼 할머니랑 매일 통화하고 이야기하고 만나서도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할머니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건 나 또한 할머니를 많이 사랑하기에 그만큼 넘쳐나는 자존심이다.

지금도 비 오고 눈이 오면 바로 할머니가 떠오른다.

전화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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