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달아나라,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시장의 파리떼에 대하여'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고.
사나운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곳으로 달아나라고.
파리채가 되는 것은 그대의 운명이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서두에서 말한다.
고독이 끝나는 곳에서 시장이 열린다고.
고독 속으로 달아나되, 고독의 끝에선 시장이 열리고야 만다.
그리고 시장의 파리떼들에게 뜯기기 전에 다시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고 한다.
필연코 열리고야 마는 시장.
시장에 득실거리는 파리떼.
이 파리떼들은 '그대'를 쏘고, 갉아먹는다.
때론 '그대'에게 아첨하지만 이 또한 징징거리며 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 앞에서 파리떼들은 옹색함과 경멸당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그대'의 말없는 긍지는 언제나 파리떼들의 기분에 거슬린다.
왜?
'그대'는 '그대'가 사랑하는 나무와 같으니까.
바다 위로 넓은 가지를 펼치고서 말없이 귀 기울이고 있는 나무니까.
기품 있게 침묵할 줄 아는 '그대'니까.
읽어가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파리떼처럼 들끓었던 나 자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도 정정당당한 의분이라 내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던 지난 시절이 떠올랐고,
큰 일은 정작 모른 척 눈감으며 먹고살 길을 모색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서
자신을 극복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한 토막을 잘라서 보면, 낯 부끄러운 시간들이 분명하다.
태어남과 죽음의 긴 토막을 바라보면, 파리가 파리를 넘어서고자 노력한 시간이지 않을까?
과거의 나는 분명 파리가 분명했지만, 그 순간에는 '그대'라고 여겼으리라.
파리가 파리인 줄 모르고 넘어서려 시도했던 시간들이 '그대'를 만들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나를 본다.
과거의 나보다 조금 더 넓어졌고, 조금 더 유연해졌고, 조금 더 자신에게 집중하는 힘이 생겼다.
고독을 외로움만으로 느끼지 않으며, 적막함을 쓸쓸함만으로 채우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나무와 같은지,
내가 사랑하는 자유로운 들풀과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다움'이라는 것을 찾아가고 있다.
아이들을 재우고, 니체의 책을 펼쳤다.
식탁 한구석에 자리 잡은 책의 향기만으로도 하루의 숨구멍이 트인다.
인문학 한 줄로 육퇴 후 쾌락으로 빠져드려는 나를 극복했다.
니체가 원했던 것이 이런 사소한 자기 극복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