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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풀풀 Mar 03. 2022

발목 잡는 심리학을 뻥 찼다.

[감정 자본주의]를 읽다가

만 5년 동안 육아에 모든 것을 바쳤다. 수면교육으로 시작된 육아 공부는 심리학, 대상관계 이론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하다.'는 신념 아래에 과거를 수용하고, 현재를 살아내기 위해 상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공부에 몰입했다.


갈증이 났다. 하면 할수록 물음이 끊이지 않았다.


과거는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걸까. 언제쯤 행복해질까. 평온이라는 상태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 여기에 존재하다가도 흐트러지는 마음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 것일까.


주변을 향한 의심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상담은 언제쯤 종료될까. 이걸 정말 계속하면 되는 걸까. 이 집단은 왜 숨어서 활동하는 느낌일까. 심리 성장과 경제성장은 왜 당연하듯 이어지는 수순이 되어버린 걸까.


그러던 중, 신나리 작가님이 운영하는 공부 공동체에서 선정된 에바 일루즈의 책들 중 한 권을 펼쳤다.

(공부 공동체에 선뜻 참여하기가 망설여져서 선정된 책들을 몽땅 사서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다.)


강렬한 표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 소개.

작년부터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툴툴 털어버리고, 한 호흡에 읽어가기 시작했다.


[감정 자본주의]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내 글로 표현이 되지 않았다. 생소한 사회학 용어들과 학자들의 문장에 오래간만에 뇌가 쫄깃하게 단련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2장을 읽었다. 에바 일루즈의 문장들을 나의 둔탁한 단어로 나열한다는 것이 쑥스럽고 오그라들기만 하지만, 이 또한 독학의 과정이라 여기고 짧은 감상을 남겨보고자 한다.




육아를 심리학으로 풀어서 실천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나마 아이가 36개월 이전, 더 늦게는 기관 생활을 하기 전 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안전한 엄마의 품 안에서 세상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붙들었다.


아이가 60개월이 넘자 조금씩 트러블이 생겼다. '건강한 한계'를 알려주려고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심도 있게 파 놓은 개인적인 과거의 서사들이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이가 저녁밥을 먹기 전에 간식을 먹겠다고 한다. 

건강한 한계는 밥을 먹고 간식을 먹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단, 여기에 부모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

격하게 화를 낸다거나, 살찐다는 협박도 안된다. 나쁜 아이라는 낙인도 안된다. 욕구가 좌절되어 우는 아이를 야단쳐서도 안된다.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아이에게 '올바른 식습관'이란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일 뿐인데 '안 되는 감정 수칙'들에 얽매이다 보니, '올바른 식습관'이란 것도 나의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이 아닌가 싶은 자괴감마저 든다.


이걸 심리학의 서사로 풀어보면 이렇게 해석될 거다.

당신은 식사에 관한 부정적인 경험이 있어서-. 아이에게 한계 설정이 어려운 것은 사소한 일에도 제재를 당한 경험이 많아서-. 우는 아이를 수용하기 힘든 것은 당신이 감정적으로 억압되어 있어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없던 화도 솟구쳐 오른다. 


단단하게 만들어 둔 나의 상처 내러티브가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나의 발목을 붙드는 단단한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그야말로 루소주의자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행동의 감정 장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정체성이 공적으로 노출되는 것, 공적으로 서사화되는 것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감정이 사회 등급화의 도구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정적 행복(사회적 역사적으로 행복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을 획득하는 능력)에 새로운 위계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중에서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위계가 존재한다. 직업, 소유한 자본, 개인의 능력 등에 따라 '물질적, 상직적 재화의 전형적 위계가 존재(에바 일루즈의 표현)'한다. 여기에 심리학의 발달은 감정의 위계를 만들었다.


난 여기서 혼란스러웠다. 중상위 계급의 전형적 위계에서 허용되지 않는 감정들이 감정의 위계에서는 오히려 더 높은 기술이고, 진화된 도구로 간주되는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난 내 아이들이 감정의 위계가 높아지면 전형적 위계 또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더욱 힘썼다. 감정의 분화와 감정의 내러티브를 풀어내는 기술들로 아이들을 대했다. 그렇게 고급화된 감정 기술을 사용하게 된 아이들은 전형적 위계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흑심을 품고서.


늘 그렇듯 육아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감정의 위계가 높아진 아이들은 하위 전형적 위계에 충실했다. 바로잡아보고자 노력했지만, 공고히 세워진 상처 내러티브가 발목을 붙잡았다. 이대로 가다간 아이들의 기본생활습관부터 망가질 것이 뻔했다.


어느 순간, 발목 잡는 심리학을 뻥 찼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가 뭐라고 지껄이든지, 지금 눈앞의 아이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


육아가 조금 더 심플해졌다.





심리학에 발목을 잡히지 않으려면, 심리학적 지식에 대한 접근권 자체가 어떻게 자아됨의 여러 형태들을 위계화하는지를 탐구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탐구를 토대로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론을 재정식 화해야 한다.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중에서


[감정 자본주의]를 2장까지 읽어가며, 내가 그토록 추구했던 심리학이 한 분야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에게 심리학은 종교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세상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주는 도구, 나를 받아들여주는 도구로 심리학을 이용한 것이다. 나에게 심리학의 쓸모는 종교였다. 그런 나의 쓸모를 경제적으로 이용한 집단도 있다. 


이제 그 쓸모가 다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심리학이 종교가 아니라 학파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나'를 이해하고, '내가 선 자리'를 바라보는 데 사용할 도구가 심리학에 사회학이 더해진 것이라고나 할까.

여기에 인문학과 경제학이 더해진다면 나를 이해하는 동서남북의 나침반이 더 정교해지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내가 선 자리를 읽어내는 힘.

어딘가에 쓸모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있는 쓸모의 도구를 이용하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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