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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현 Jun 27. 2018

호치민, 동양의 파리 사이공

호치민(호찌민)시는 인구 861만 명(2017년) 비공식 인구는 1,000만 명이 넘고, 서울시의 크기보다 세배가 넘는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로 사이공 강과 동나이 강 하류에 자리 잡고 있다. 16세기 베트남인에게 정복되기 전에는 크메르 제국(현재. 캄보디아)의 주요 항구였다. 이때는 쟈딘 Gia Dinh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는데,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며 사이공 Sai Gon으로 개명되었다. 유럽인들은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를 통킹(Tonkin),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남부는 코친차이나(Cochinchine) 또는 네덜란드인들은 뀌남(Quinam)이라 불렀다. 그리고 후에를 중심으로 한 중부는 안남으로 이후 성립된 남 베트남은 코친차이나와 안남의 남부를 통합하여 수립된 것이다.


베트남을 침략 한 프랑스는 1859년에 사이공을 점령하고, 1862년부터 남부 베트남 지방을 코친차이나라고 칭하며 사이공을 수도로 삼았다. 베트남 중부 북부는 물론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점령 해 프랑스 령 인도차이나를 통치하는 동안에도 사이공이 수도 (1887 ~ 1901년) 역할을 하며 프랑스의 도시계획으로 근대도시가 된 후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때 파리를 모방 해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에 ‘동양의 파리’(the Paris of the East)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한때 '극동의 진주'(Pearl of the Far East)로 칭송받았다.


사이공은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남베트남(월남)의 수도로 그 지위를 유지했지만,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통일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는 하노이가 된다. 그다음 해 인 1976년부터 호치민의 이름을 따서 호치민시로 개명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사이공은 호치민시 시내 일부를 의미하지만, 베트남 남부 지방 사람들에게 사이공은 호치민시 그 자체를 의미한다. 기차역은 여전히 사이공 역으로 불리고, 남부 지방을 오가는 버스에는 사이공이라고 선명하게 목적지를 표기해두고 있을 정도이다. 참고로 호찌민시는 베트남어로 Thành phố Hồ Chí Minh을 줄여서 TP. HCM, 영어로는 Ho Chi Minh City를 줄여서 HCMC라고 쓰기도 한다.


참고로 베트남 전쟁 때 한국에서는 베트남을 한자음 그대로 월남(越南)으로 표기했는데 '越南'을 베트남어 독음으로 읽은 것이 Việt Nam이며, '볫남' 또는 '비엣남' 정도로 발음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본어 표기의 영향으로 '베트남'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남베트남을 정통으로 보았으므로 남베트남 정권을 월남, 또는 자유 월남이라고 했다. 북베트남은 월남(베트남) 독립 동맹(월맹)의 불법 정권으로 취급해 '비앳민 Việt Minh'에 의해 설립된 불법 정권'이라 하여 비엣민의 한자 표기인 월맹(越盟)이라 하였다. 비슷하게 대한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중국 공산당의 불법 정권으로 취급해 중공이라고 불렀고, 중화민국이 통치하는 대만을 자유중국이라고 불렀었다. 한국에서는 이후 북베트남(월맹)이 남베트남(자유 월남)을 무너뜨리고 통일한 뒤에 세워진 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부터 '베트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마치 이전의 '월남'과 단절된 신생 국가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호치민시를 '사이공 함락'이라는 단어로 기억하고 있는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베트남 양국은 1992년에 공식 외교관계를 맺게 되어 경제적, 문화적, 인적으로도 교류가 활발해지게 되었고, 수위권의 무역대상국이 되었다. 이미 수교를 맺은 지 25년이 지났으니 역사는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75년에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전국의 다른 도시들과 같이 전쟁 후 영향을 극복하고 복구 사업을 통해 도시를 재건축하였다. 80년대까지 전국에서 혁신정책을 시작한 이래로  전국의 인민들이 호치민시로 이주하면서 호치민시는 '약속의 땅'이 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난 도시이며 베트남 전체 인구의 10%가 살고 있는 만큼 항상 분주하고 젊고 역동적이며 또한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동남아시아 특유의 무더운 기후와 어울려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에 숨이 턱 막힐 것 같지만, 베트남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호치민시는 도시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호치민은 베트남 경제를 주도하는 상업도시로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고층 건물과 고급 주거 단지가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신축 중인 빌딩들과 명품 매장들은 변화하는 호치민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약 80년이라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며 세워진 유럽풍 콜로니얼 건축물이 가득해 유럽의 향기가 남아 있고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호치민의 관광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식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노트르담 대성당, 중앙우체국, 호치민시 인민위원회 청사는 프랑스 식민지의 아픈 역사를 문화로 승화했다는 평을 이끌 만큼 호치민 시내에서 조화로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SAIGON RISING https://youtu.be/qSIHmY2BOdI


현재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지만, 베트남의 경제와 교통의 중심은 호치민시가 베트남의 최대 도시이다. 중국의 경우도 북쪽에 수도이며 정치 도시인 베이징과 경제도시인 남쪽에 있는 상하이가 하노이와 호치민의 도시적 특성과 지리적 위치를 설명할 때 자주 비유되곤 한다. 두 도시의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문화도 현격하게 다르다. 하노이는 오랫동안 베트남의 수도였기 때문에 유교풍의 권위에 젖어 있는데 비해 호치민시는 실속을 챙기는 분위기다. 오랜 역사의 차이는 호치민과 하노이 시민의 소비성향을 다르게 했다. 현지에는 '남부 사람은 현재를 위해 소비하고 북부 사람은 미래를 위해 소비한다'는 속언이 있다. 호치민 시민은 일상의 작은 사치를 즐기고, 외식이나 여가 등에 더 많은 지출을 한다. 이에 비해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인 들은 저축 성향이 강하다. 베트남 북부 지역의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기존 사용 브랜드에 충성도가 높은 반면, 남부 호치민시의 소비자들은 외국에서 유입된 새로운 상품에 큰 거부감 없이 호기심으로 소비를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호치민 시의 이러한 소비 성향은 1975년 통일 이전에 미국과 친근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외국 문물을 다양하게 수용하던 옛 사이공의 역사에서 기인했으리는 것이 코트라 호치민 무역관의 분석이다. 또한 미국의 영향도 아직 남아 있는지 적어도 호치민 시내에서는 영어로 관광이나 식사를 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이다. 이건 하노이에서 5성급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 정도에서만 영어가 통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참고 및 인용

표지사진 Saigon Free Walking Tours

호찌민 시 - 위키백과

프렌즈 베트남 -안진헌, 중앙books

베트남 전쟁 -나무위키

월남 -나무위키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 ‘호치민’, 유럽의 정취 물씬 - 조선비즈

베트남 두 도시 이야기…하노이와 호찌민 

맥도날드는 왜 호찌민시에 1호점을 냈을까? - ko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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