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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Jun 21. 2021

아이야, 그러해도 살아보자

한발자국만 뒤로.


저는 41층이 최상층인 고층아파트에 삽니다.

처음에 30층으로 이사가 결정되었을 때는 ‘그 높은 곳에서 어떻게 살지’ 란 생각이 맨 처음 들었습니다.

이사하고 몇 달은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고

귀가 아픈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제가 창 밖을 내다보려 할 때마다 아이들이 위험하다며 소리를 질러댔고, 창이 닫힌 상태에서 아이가 창틀을 밟고 있어도 위험하다며 제가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칼바람이 불어서 옷을 껴입고 내려가면

화창한 날씨에 슬며시 옷을 벗어야 했고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아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고층아파트 특성상 내진설계가 되어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움직인다는 설명을 들었어도

화장실 벽타일이 그로 인해 퍽퍽 터져나가는 일은

두렵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별 탈 없이 4년째 초등학생 아이 둘을 키우며

적응하여 잘 살고 있습니다.

가끔 사방이 기다란 막대기로 둘러싸인 가운데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동그란 놀이터는

커다란 새장이 아닌 새둥지처럼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옆 아파트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저희 아파트보다 조금 후에 지어진 옆 아파트는 50층까지 있어 창마다 아래는 열 수 없게 되어있고

윗부분만 열 수 있는 반창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간밤에 추락사고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고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먼저 퍼져나갔습니다.

일주일에 2일 학교를 가고, 3일을 집에서 화상 수업을 하는 초등 고학년들이 수업시간에 사고에 대해서 먼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저희 아파트에 사고 났어요. “

“누가 떨어졌대요. “

“맞아요. 어젯밤에 세 번이나 방송 나왔어요.”


줌 수업을 끝내고 나 온 아이는 아이들이 얘기해준 사고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엄마 누가 아파트에서 떨어졌대. “

“아니야, 애들이 그냥 하는 말이지. 헛소문일 거야. “


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은 종종 그런 거짓말을 하기도 하니까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맞을 수 없는 어린이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는 아이부터

윙슈트를 입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해봤다는 아이까지 있으니까요.


그런데,

간밤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났고

조금 후에 아이가 발코니에서 떨어졌다며

부모를 찾는다는 방송이 나왔다고 합니다.


구급차가 오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는 틈으로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사고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거의가 아이의 무사를 빌었을 겁니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제발 기적이 일어나 죽지만은 않기를.

고층아파트 살면서 너무 큰 기대일지라도 모두 마음속으로 빌었던 듯합니다.


입주한 지 1년이 갓 넘은 새 아파트에다가 근처에서 가장  높은 시세를 가지고 있는 아파트.

학군이 좋은 곳도 아니고

신설 학교가 많아서 공부를 하는 아이보다는 그 반대인 아이들이 많은 곳.

목숨을 던진 이유가 경제적인 이유도, 학업이지는 않을 거란 막연한 추측만 남고 아이는 사라졌습니다.

나이나 성별도 알지 못하고 아이는 ‘00 사고’ 란 이름으로 마음 한편에 남았습니다.

자세한 상황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 유가족들에게는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갈망이 찾아왔을 때 방패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계속되는 고통이 버거워 이제 그만 끝을 내고 싶다 느껴질 때, 손가락 하나라도, 옷깃 한 자락이라도 뒤로 당겨줄 무언가. 그 무언가를 어찌 심어주어야 하나요.


인간에게 죽음은 언젠가 누구나 닿아야 할 종착지인데 그리 빨리 닿아야 했던 건지..


그리도 살아가는데 미련이 없었을까

친구에게 내일 보자 하지도 않았고

도서관에 빌린 책도 다 반납하면서 정리 란걸 했을까.

끊어놓은 운동이 몇 달이 남았어도 별 상관없고

아끼던 옷이, 보고 싶던 영화가, 모아왔던 사진들이,

아무래도 상관 없어지는 순간.

정리가 끝이 나서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순간.

아파트의 높이보다 더 높은 벽을 넘긴 순간.


생각의 실타래가 끊임없이 풀려서 머릿속에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쥔 주먹 안의 모래가 그러하듯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내 생각 속에서,

아이의 죽음은 흘러가고 자그마한 자국만 남았습니다.


아직은 삶을 살아보았다고 하기에 너무 어린아이이기에

죽을 만큼 버겁더라도

살아보라고,

모든 걸 다 그만두어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보라고,

아이가 죽을 마음을 먹기 전에

부모에게 이런 말을 할 시간은 꼭 내어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부자리에서 엄마가 만지에게 물었다.
“만지야, 너도 죽고 싶을 때 많지?”
“많지.”
“너 혹시 내일 죽을 거면 오늘 엄마한테 말해. 엄마가 오늘 먼저 죽을게. 그 정도 효도는 하고 갈 수 있지?”
“...... 있지.”
“자.”


김려령 ‘우아한 거짓말’의 뒷이야기 ‘두 번째 엔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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