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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Jul 03. 2021

봐줄 만하다는 외모 평가를 받았습니다.



남편 쪽의 친척 부부가 있습니다.

그녀는 저보다 1년 전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는데

7년이 넘는 기간을 연애했으면서도 못다한 사랑이 많은지 부부의 스킨십 장면을 심심찮게 노출합니다.


결혼 10년 차가 넘어가자 서로의 가정에 아이들이 커서

부모의 손길 없이 자기들끼리 노는 시간이 길어졌고,

부부가 모여 술 한잔씩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생겨났습니다.

감사한 시간입니다.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뭐 그리 진지한 대화가 오갔겠냐만은 ‘명품을 하는 사람이 남편이 아닌 아내여서 좋다’는 말에 흥미가 일었습니다.


루이뷔통 여행가방을 든 남자가 탄 배가 난파되었는데

가방이 얼마나 촘촘히 잘 만들어졌는지 물이 스며들지 않아 바다 위에 둥둥 뜨는 가방을 잡고 살아났다는 남자의 이야기.

그 이후로 유명해졌다는 명품가방 루이뷔통.

제게 ‘명품’ 은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물건’ 딱 그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궁금했습니다.

그분의 생각이.


운동을 좋아하고, 남성과 여성에 약간의 가부장적인 역할을 부여하며,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어색함이 없는 그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남자가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것보다 자신의 여자가 명품을 하고 다니면서 ‘대접’이나  ‘부러움’을 받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명품을 개인의 소장욕구가 아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과시 용품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에서 뻗어 나온 생각일 겁니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명품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야지 못생긴 얼굴에 명품을 든다고 다 좋아 보이는 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문득 의아해져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자기가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 “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니 거울 보면 알지. “


의아함이 풀리지 않아 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모르겠는데 거울 봐도? 어떨 땐 엄청 못생겨 보이고 어떨 땐 좀 괜찮아 보이고. “


이번에는 제가 답답하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그 정도면 봐줄 만하잖아? “


갑자기 던져진 외모 평가에 화가 나지도, 억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걸 어떻게 알지? “란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외모 자존감은 여성보다 남성이 월등히 높다고 들었습니다. 주변에서도 자신이 못생겼다는 남자들을 본적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대부분의 남자들의 시선은 섬세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흐뭇한 미소로 마무리를 합니다.


여성들은 외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 시간에 비해 만족도는 낮습니다.

어제는 머리가 마음먹은 대로 안되고

오늘은 옷이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마음에 안 들고,

내일은 화장이 뜬 것 같아 속상할 겁니다.

아주 가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 어깨 펴고 당당히 걸어가는 날도 있겠지요.


그것이 남아선호 사상에 기인한 것인지, 남성과 여성의 본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고 그른지 따위는 애초부터 없습니다.

(성에 따른 이분법적인 나누기와 근거 없는 성비난은 사양합니다.)


여성이 외모에 할애하는 시간과 비례해서 평가의 횟수도 올라갑니다.

여성에 대한 외모 평가는 너무 쉽게 이루어집니다.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도 하버드 여대생의 외모 평가를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는 건 너무 유명한 일화입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외모 평가는 여성들도 남성들만큼 쉽게 많이들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외모는 중요합니다.

이성에게 어필하는 가장 첫 수단이고

가장 쉽게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장치가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성에 대한 취향은 갈리기 나름입니다.

아무리 잘생긴 배우를 놓고도 ‘난 얘 별로야’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한 이유가 ‘개인의 취향’인 것처럼 ‘남들의 예쁨’과 ‘남들의 멋짐’을 맹목적으로 따라갈 이유는 없습니다.

사자탈을 쓴 여우처럼 결국 땀에 절어 더 못난 모습으로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가진 털을 매만지고, 자신의 꼬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더 나은 것이란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외모 그 자체보다는 외모에서 배어 나오는 이미지에 호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 사람은 당당해서 멋져 보여.”

“저 사람은 항상 친절하게 웃고 있어서 예뻐 보여”

이미지는 ‘육감’처럼 없는 듯 하지만 틀림없이 있으면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빠와 외가댁이 사이가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간 자리에서 저는 단 한 번을 웃어본 적이 없습니다. 친오빠와 겨우 눈빛을 교환하며 좋아하는 음식도 한두 개 먹고 나오는 게 다 였습니다.

그때, 오빠와 저는 애들이 저리 침침해서 어쩌냐는 말과 약간의 경멸스러운 눈빛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 때 제 별명은 ‘몬생이’ 였습니다.

‘몬생아, 몬생 몬생 하구나.’ 라는 못생긴 제가 가진 테마송도 있었습니다. (놀림 노래라고 해야할까요?)

하지만 제 몫을 하는 성인이 된 이후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냥 매사에 진지한 사람이라는 재미없는 딱지가 붙었을 뿐입니다.




요즘 학생들이 온라인 팬시점에서 구입하는 많은 물품들은 예쁘지만 쓸모가 없거나 쉽게 망가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물건들을 ‘예쁜 쓰레기’라고 부릅니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예뻐도 그 쓸모가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마음에 듭니다.

물건이 아무리 예뻐도 쓸모가 없으면 쓰레기라는 말이 붙는데 하물며 사람이라면,

외모가 아무리 예쁜 사람일지라도 기본적인 예의가 없거나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결여된 이라면 그 예쁜 외모로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높은 곳에 서 있더라도 금세 바닥으로 내팽개쳐질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제게 ‘봐줄만하다’라는 말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못생겼다고 말하기엔 미안한 마음으로 나름 우상향 시킨 말인지, 매우 아리따움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 낮춘 말인지.. (히히)

허나, 저는 그런 평가는 가벼이 넘길 수 있습니다.

외모 말고,

제 글이 ‘봐줄 만 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을 따름입니다.



사진출처 : Unsplash- Milada Viger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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