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스테이지로
화음이는 일주일마다 발의 각도를 바깥으로 살짝씩 꺾으며 새로운 깁스를 해야 했다. 발목이 꺾일 때마다 아기는 제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볼륨으로 악악 고통스럽게 울었다. 울다가 변을 지리기도 했는데 기저귀에서 새어 나온 변의 일부가 깁스 안으로 들어가 욕창이 생기기도 했다. 작고 가녀린 아기의 다리에 깁스를 바를 때마다 채 닫히지 않은 내 골반도 함께 욱신거렸다. 한여름, 미국 병원의 실내는 ‘흥! 전기세 따위!’ 코웃음을 치며 어느 우화에서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 핏대를 세우고 냉기를 불어댔던 바람의 자기 증명처럼 불필요하게 찬 기운을 과시했다. 옷을 아무리 껴 입어도 바들바들 떨렸다. 출산 직후에 곧장 얼음찜질을 권하고 차가운 오렌지 주스를 제공하는 미국 병원의 아연실색할 처방을 거치고 보니 병원 실내의 찬 공기는 그들만의 회복 수단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와 나는 피부색만 다른 것이 아니라 장기의 구조, 운행 방법까지 뭐 하나 맞는 구석이 없단 말인가. 절절 끓는 온돌 바닥에 내복으로 무장한 채 땀이 쏙 빠지게 몸을 지지고 싶다는 생각을 수천번 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화음이로 인해, 오로가 그치지 않은 산후의 몸으로 많게는 한 달에 15번의 병원 예약을 쫓아다녀야 했고 그 바람에 가뜩이나 약해빠진 관절들은 버티지 못하고 덜거덕덜거덕 소리를 냈다.
그런 중 얻게 된 하나의 이득은, 병원 출입이 잦다 보니 자연스럽게 병원 직원들과 친분이 쌓였다는 것이다. 의사, 간호사는 물론이고 바이탈을 체크하는 직원, 체크인. 아웃을 돕는 프런트 직원들까지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낯선 땅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늘 얼마간의 긴장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병원은 점차 모순적인 안식처가 되어가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화음이의 성장을 모두 지켜보았으니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한국의 가족들보다 어쩌면 더 많은 기억과 기록이 병원 사람들에게 심어져 있는 셈이다.자주 드나들어서인지 화음이는 병원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병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화음이의 삶에서 병원과 친밀해졌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주간의 깁스 기간이 끝나고 발의 각도를 고정하는 보조기를 차게 되면서 물리치료가 시작되었다. 보조기는 얼핏 스노보드를 닮았다. 누워있는 아기에게 이런저런 옷을 입혀 스냅사진을 찍는 스튜디오의 콘셉트처럼 화음이의 모습은 마치 스노보드에 올라탄 실력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교회 영유아부실에서 마주친 청년 한 명이
”어머낫! 이건 신상 신발이에요? 와우! 정말 멋있어요! “ 감탄하며 화음이의 보조기를 만지작 거렸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발언에 와하, 하고 웃음이 터졌는데 나는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짧은 감탄사는, 화음이를 장애에 굴복한 가엾은 아기가 아니라 신상 신발을 신은 셀럽처럼 보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때로 보조기의 생소함에 조심스럽게 아이의 장애 여부를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시선에 가볍게 웃어 보일 만큼 상황을 완전히 흡수했고 대범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화음이는 목가눔도 뒤집기도 늦었다. 배밀이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고 아기의 초점도 어딘지 불안정해 보였다. 우리는 이 모든 아기의 더딤이 무거운 보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어렴풋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외면하고 싶었을 뿐.
나의 의식 저 깊은 곳에 있던 불안이 수면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화음이가 6개월쯤 자랐을 때였다. 화음이는 여전히 일반적인 발달 곡선을 따라가지 못하고 얼마간 뒤처져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일반과의 간극이 점차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예배 후에 모든 성도들이 다시 모여 성경공부 시간을 갖는다. 보조기를 찬 화음이를 안고 친교실 의자에 앉아 성경공부를 진행하시는 목사님의 강의를 흘려듣고 있었는데 건너편 대각선에 앉아계시던 남자 성도님 한 분이 성경공부 시간 내내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고 계셨다. 나는 어쩐지 조금은 언짢은 기분을 느꼈지만 으레, 화음이의 보조기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성경공부가 끝난 후 그 남자 성도분이 아내와 함께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곳으로 1년 단기연수를 오신 소아청소년과 의사였다. 짧은 자기소개 후 한껏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는 나에게 자신의 소견을 전했다.
”저... 아기 뇌 검사를 좀 받아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
내면 깊숙이 외면한 채 억지로 쌓아 올리던 둑이 그의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가라앉아 있던 불안이 거센 물결처럼 범람하기 시작했다.나는 화음이가 엔젤만신드롬 진단을 받았던 날보다 뇌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을 들은 그날 오후에 더 크게 목놓아 울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감추고 싶었던, 아무도 모른다면 없는 일이 될 것처럼 숨겼던 불안이, 들켜버린 순간이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터져버린 나의 울음에 몹시 당황했다.
”아... 아직 몰라요. 검사를 해 봐야 알지요. 일단 담당 소아과 선생님의 진료를 받아보세요. “
그의 권유는 가까스로 첫 번째 스테이지를 통과한 우리 앞에, 주변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의 무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무시무시한 신호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