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향해 걷는 법

예비하신 피할 길을 따라

by 채플힐달봉

나는 그날 이후로 밤마다 가위에 눌렸다. 한번 터져 나온 불안은 사그라들 줄 모르고 맹렬하게 나의 온 정신과 육체를 태웠다. 그나마 유지하던 신앙의 습관들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의 나는 기도하는 법을 잊었고 평안을 구하는 그 어떤 형태의 경건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불안과 의심의 노예가 되어 매일 밤 환청에 시달렸다. 만약, 그 시기에 기도하는 친구가 곁에 없었다면 나는 아마 환청과 환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친구는 그 무렵, 남편의 단기 연수를 따라 미국에 방문 중이었는데 남편이 있는 테네시(Tennessee)에 머물지 않고 우리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두 달간 묵던 중이었다. 한 두 살 차이를 둔 네 명의 아이들을 함께 돌보면서 친구와 나는 마치 기숙사에서 공동육아를 하는 대학생 엄마가 된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매일 박작박작하고 소란스러운 집안에서 자주 웃었다. 주말이면 오징어를 뜯어먹으면서 ‘K팝스타’ 악동뮤지션이 탄생하는 과정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다.


지금에 와 돌아보면, 그 시기에 친구가 나의 집을 방문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감당 못할 그날의 위기에 다윗을 도왔던 요나단처럼 나의 친구는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뇌검사를 받아보라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도 함께 들었고 집으로 돌아와 불안에 잠식당한 나의 어깨를 안아준 것도 그 친구였다. 내가 밤마다 환청에 시달릴 때 친구는 옆 방에서 나를 위해 울며 기도했다.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의 벽을 세우고 나를 위해 싸운 것은 오롯이 친구의 헌신이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나는 친구를 우리 집에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라고 믿는다. 친구는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분명한 ‘피할 길’이었다. 매일의 북적임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친구의 기도는 그날의 내게 엄습했던 치명적인 불안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다면, 주님. 뒤늦게 피할 길 주지 마시고 애초에 시험 자체를 안 주실 수도 있지 않나요? 왜 굳이 힘든 길을 돌아가게 하시나요, 나는 수도 없이 하나님께 따져 물었었다. 하나님은 그날의 나에게 한 번도 그 대답을 분명하게 주시지 않았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봤을 때 나는 하나님이 내 질문에 단 한 번도 침묵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려움이고 저주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과정들이 나에게는 반드시 필요했던 성장통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폴 투르니에

하나님은 나의 중요한 시기마다 행여 내가 낙심하여 돌아설까 노심초사하며 피할 길을 조금씩 열어주시고 조심스럽게 나를 응원하셨다. 내가 지금의 나 됨은, 모두 하나님의 섬세한 작업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팠지만, 아팠던 만큼 단단하게 자랐음을 본다. 적절한 가지치기가 과수를 튼튼히 하고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개입과 ‘상처 내기’는 나를 더욱 반듯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했다. 그것이 은혜였다고 나는 당당히 고백할 수 있다. 그날에 친구와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교회에서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셨던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뇌 검사를 받아보라 권하셨던 그 의사 선생님은 그날 이후로, 우리 집을 몇 차례 방문하셨다. 아이를 세심하게 관찰하셨고 선뜻 문진표를 작성해 주셨다. 시간과 마음을 들인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분의 정성은 나를 위로했고 불안을 떨칠 수 있도록 도왔다. 혹시 한국 방문을 계획 중이라면 모 대학병원 소아신경과 전문의 누구를 찾아가 보라는 추천도 잊지 않으셨다.


미국 병원은 응급이 아닌 이상 예약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상당하다. 화음이의 담당 소아과 선생님과의 예약은 한 달 뒤로 잡혔다. 우리의 마음은 한시가 급한데 한 달 뒤라니!

한 달을 기다려 드디어 만난 화음이의 담당의사는 일단 피검사부터 받아보자고 했다. 설상가상, 피검사 결과를 받기까지 6주의 시간이 더 걸린다고 했다. 맙소사, 고작 피검사 하나에 6주씩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니! 부모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국 병원의 처치는 그야말로 천하태평이었다. 우리는 피검사 결과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교회에서 만난 의사 선생님이 추천하셨던 모 대학병원 소아신경과에 예약을 하고 미국에 온 지 불과 1년 만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계획하지 않은 일,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이토록 무겁고 버거울 줄은, 1년 전 우리 중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햇살같은 미소로 집을 채워 준, 친구와 나의 아이들


광주기독병원 소아청소년과 조형민 선생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선생님의 관심 덕분에 아이의 장애를 빨리 알게 되고 일찍 개입할 수 있었어요. 늘 평안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