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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Mar 20. 2020

가꾸는 일

나는 화장을 할 줄 모른다. 호기심도 욕심도 많은 편인데 웬일인지 화장과는 친해지질 못했다. 살면서 한 두 번은 나도 화장을 하면 좀 더 예뻐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동안의 상상일 뿐이었고, 나와 화장은 인연이 없는 채로 지금에 이르게 됐다.


화장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도 아주 공이 드는 일이고, 섬세함과 감각을 요구하는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인기 있는 직업이 되었고, 누군가는 화장으로 자신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일로 인플루언서가 되는 시대다. 꼭 그런 직업인이 아니더라도 출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그 흔들림과 혼연일체가 되어 눈썹을 올리고, 립스틱마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바르는 그녀들은 또 어떤가! 나는 늘 감탄한다. 내가 공을 들여 내 얼굴을 가꾸는 일을 할 만큼 부지런하지 못할 뿐. 귀찮음이 늘 이긴다.


내가 화장과 친해지지 못한 건 이처럼 나의 게으름이 가장 크다. 그러니 가꾸기에 열중했던 친구들에 비해 외모가 빛날리는 만무했다. 이십 대, 뭘 해도 이쁘다지만 실은 화장하면 더 예쁘다. 그래도 난 받아들이기로 했다. 화장하지 않는 나를.


아마 나처럼 선택적으로 화장을 안하던 사람들도 사회에 나가면서 '할 수 없이' 화장을 강요받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보통은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부터는 '어른' 이라는 수식어를 단 채로 출퇴근을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어른의 모양새도 요구받는다. 내 경우에는 학생일 때 일을 시작해서 상대적으로 '어른의 모양새'를 강요받지 않았고 이후에도 프리랜서로 일하다보니 부담이 덜했다. 나는 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때로는 화장을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 학부모에게 좀 더 신뢰감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해서 내심 그런 이미지를 이용하기도 했다. 직업에 따라서는 아마 이런 꼼수가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화장과 신뢰감, 혹은 화장이 어른의 모양새라는 개념들에는 어떤 상관 관계도 없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인식이 존재하니까. 아이들은 좀 다르다. 선생님은 그저 화장을 못할 뿐이라는 걸아이들은 몇 번의 만남이면 쉽게 알아챘고 나에게 화장을 가르쳐주겠다는 의욕을 보이곤 했다. 아이들에게는 꾸미는 일에 대한 어떤 사회적 함의도 없었다. 그저 나를 가꾸는 일이라는 개념뿐.


어찌됐든 오랜 시간 화장을 하지 않은 채로 살다보니 뜻밖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일찍부터 화장을 해 온 친구들은 이제는 본인이 보기에도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어색해서 맨 얼굴로 외출하기가 꺼려진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럼 하면 되지, 라는 무심한 내 대답에 '뭘 모르는 년' 이라는 표정으로 "귀찮아서 그렇지!" 라고 징징대곤 하는 것이다. 반대로 '맨 얼굴의'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이 정도면 조금은 부러워할 일인가. 그렇다면 말이 나온 김에 화장을 하지 않아서 좋은 이유를 더 말해보자. 화장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단순히 화장'만'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옷이나 신발, 헤어스타일이나 악세서리 등을 단순하게, 무엇보다 나이나 직업 등을 반영하지 않은 그저 '나만의 코드'로 유지할 수 있는 기특한 장치가 되어 준다. 쓰다보니 이 조건 좀 괜찮아 보인다.


무례한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저 나이에 맨 얼굴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예의는 아니죠.' 따위의 말을 들으면 그 폭력성에 분노하는 형편이니, 화장을 아예 못하는 게 차라리 낫다. 화장을 좋아하면 좋아하는대로, 나처럼 화장과 친해지지 못하면 그런대로 살게 둘 수는 없는 걸까. 다분히 개인의 취향에 속하는 일이 어째서 사회적으로 한 개인을 판단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나아가 그 잣대로 누군가를 평가까지 하게 되는 걸까.


아이들 말대로 어른들은 이상하다. 화장과 관련한 일련의 삽화들을 떠올려보니 일관성이 하나도 없다. 10대의 강을 건너는 순간 여자의 '민낯'에 대한 평가는 순수의 상징에서 무례의 표시로 뒤바뀐다. 화장이 부덕에서 미덕이 되는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정하는지 알 수 없으나 당사자인 여성의 욕망과 목소리는 애초부터 배제된다. 묻지 않고 듣지 않고. 화학 물질이 아이들 피부에 해롭기에 화장을 금한다는 말도 궁색하다. 이 미세먼지 나쁨의 나라를 건설한 어른들이 말이다.  -은유,  <다가오는 말들>


어떤 철학적 혹은 사회적 함의가 담긴 선택은 전혀 아니었으나, 적어도 외부적인 분위기나 시선의 폭력에 떠밀려 화장하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준 나의 게으름과 여러 상황들에 고마움마저 갖게 된다. 화장을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온전히 선택의 문제임을 잘 알게 될때까지 용케 버텨온 기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 두 번은 내가 '관리'에 지나치게 무심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화장을 하는 것만이 '관리' 는 아니나, 나를 가꾸고 돌본다는 의미에서 내가 실천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으니 괜한 화장을 붙잡고 떼를 쓰는 격이다. 언제부터 관리 타령 했느냐, 너는 한 번이라도 과즙미를 위해 공들여본 적 있었느냐. 참 염치도 없다.


그럴 때마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내가 할 수 있는 나를 가꾸는 일들에 집중해 본다. 손톱을 바싹 깎고 곱게 갈아 매끈하게 하거나, 발 뒤꿈치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들 말이다.


놀랍게도 나에게 저런 일들은 내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기분이 안좋은 일이 있거나, 우울할 때면 신경을 써서 샤워를 하고 내가 좋아하는 향이 나는 바디로션을 바르고 잠들곤 하니까. 나를 아끼는 일, 나를 가꾸는 일의 기준은 온전히 '나'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매일 곱게 화장을 하는 일일수도, 나처럼 손톱을 깎고 공들여 샤워를 하는 일일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옷 입을 때나 이불을 덮을 때 발 뒤꿈치에서 '서걱서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건조해서 정전기라도 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불편한 감각과 소리는 내 발 뒤꿈치가 낸 소리였다. 반 년 정도 비가 내리지 않은 논밭처럼 쩍쩍 갈라진 채로 이불이든 수면 양말이든 닥치는대로 부딪히며 앙칼진 울음을 우는 내 발 뒤꿈치. 보물이 숨겨진 위치라도 가리키듯이 아주 책임감 있게 갈라져 버린 발 뒤꿈치를 오래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슬퍼졌다. 단지 좀 바빠서 관리를 못했을 뿐인데, 내가 나를 방치해 두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 마저 들었다. 아니다. '바빠서 나를 돌보지 못했다.' 는 말 앞에 '단지' 같은 부사를 붙이고 있는 게 서글픔의 이유이려나.


가꾸고 돌보는 일이 그렇다. 하면 티도 안나지만, 안하면 금방 거지꼴을 면치 못하는 집안 일처럼 어떤 것을 관리하고 가꾼다는 것은 실은 이렇게 전혀 티 나지 않는 수십 가지의 일을 시간과 공을 들여 하고 있음을 말한다. 게다가 나 라는 존재를 사랑해주자 마음 먹으면 내가 나에게 해줘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좀 놀랄 정도인 것이다. 내가 나 하나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란 사소한 생각의 정리부터, 목욕의 방법이나 피부 관리, 발 뒤꿈치의 각질을 제거하는 일이나 관계의 문제 해결, 자아의 실현이나 이상의 추구까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니 결국 모든 것을 접어 둔채로 편안히 누워 있는 것으로 나에 대한 그 모든 애정을 표현하고 마는 것이다.


얼마만인지도 모를 만큼 오랜만에 내 발 뒤꿈치를 관리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묶은 각질을 조금씩 벗겨내고 평소에는 아껴바르는 내 최애 바디 로션을 무려 발 뒤꿈치에 부족하지 않게 발라준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 발을 조물조물 만져주게 되니 또 좋다. 발 뒤꿈치의 각질이 미세하게 깎여 나가는 걸 바라보는 시간 동안은 마치 세상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 같다. 이런 집중의 시간이 소중하다. 아주 사소한 일을 아주 집중해서 해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앞으로도 나를 가꾸는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 맘이 한결 너그러워지니 괜스레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마주친 화장하는 그녀들에게도 화장이 부담 없고 가벼운 일이기를 바라게 된다. 누군가의 강요나 판단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녀가 스스로를 가꾸는 일이기를. 여성의 가꾸기를 직업이나 처지, 심지어 염치와 엮어 멋대로 재단하는 사회가 아니기를. 자신을 가꾸고 드러내는 수단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음으로 비난 받지 않기를. 적다보니, 이 모든 고민은 그저 폭력적인 잣대와 시선들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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