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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n 25. 2020

"사랑한다면 차라리 고통을 저울질하라"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니까.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데 있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남이 힘든 것도 못견디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그 '힘듦'이 그 사람을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보이도록 한다고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자신이 그 사람보다 못났다고 생각이 드는 게 싫다. 타인의 고통은 안중에 없고 자신의 이미지만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의 고통까지도 착취하려 든다. 


반면에 좋은 사람은 남이 힘든 것을 함께 견딘다. 상대방의 고통의 크기를 함부로 짐작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저울에는 늘 상대 쪽에 추가 몇 개 더 올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비극적인 존재로 몰아가지 않는다. 그 사람이 공감 받길 원하는 그 지점을 느끼기 위해 살피고 들어본다. 평소처럼 안부를 묻고 그가 이야기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 때문에 그가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동시에 그와 자신을 분리할 줄 알기 때문에 힘든 사람보다 고통스럽다고 가장하거나 빨리 행복해지라고 조급해하지 않는다. 


아픔이나 시련을 겪으면 주변 사람을 다시 보게 된다는 말들을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사람은 가장 좋은 순간, 가장 나쁜 순간에 극명하게 본모습을 드러낸다. 영원한 연극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힘들 때 연락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 안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 같은 이분법적인 방법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말자. 사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존재니까. 


다만 그저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설명할 수 없어도 나는 기억하는, 내 모든 세포가 기억하는 순간. 이런 순간을 겪고 나면 누군가를 쉽게 '안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그저 내 마음 속으로만 말할 뿐이다. 동시에 누군가가 힘들 때,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타인의 고통으로 나의 안위에 힘을 실어주지는 않는지, 그의 고통을 '단정' 짓고 마음 편해지려 한 건 아닌지 되묻는다. 그 역시 그저 내 마음 속으로만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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