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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02. 2020

"나는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유럽과 이탈리아는 그동안 순진한 환상에 젖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파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면을 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파시즘은 새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원래의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없게, 좀더 존경받을 수 있게, 그리고 파시즘으로 초래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 걸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만일 내가 실제로 우리의 박해자들 중 한 명을, 아는 얼굴을, 그 오래전 거짓말을 다시 마주쳤다면 증오와 폭력의 유혹에 굴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쓸 때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나는 내 언어가 객관적일수록,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을수록 신뢰를 주고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정당한 증언이 제 기능을 할 것이며 바로 그때 심판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심판관은 바로 여러분이다.
그렇지만 노골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나의 이런 태도가 무분별한 용서로 받아들여지지 않길 바란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이탈리아와 외국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나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럴 때만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지만) 적을 용서하라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는 적은 더 이상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 부록 "독자들에게 답한다" 중


그의 독자들이 보낸 질문 중 "당신의 책에서는 독일인들에 대한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다 용서한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한 대답 중에서 발췌하였다. 그의 글이 주로 그렇지만 한 글자도 불필요하지 않고 한 글자도 부족하지 않다. (그리고 이 질문 자체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증오와 원한과 복수심을 가지지 않으면, 그것을 용서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건가. 반대로 말하자면 어떤 것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끊임없이 그것을 증오하고 원한을 품고 복수심을 키워야 하는 것인가. 부당한 일에 대한 반응은 증오와 용서 그 둘 뿐인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기 연민을 내려놓고, 자신이 직접 겪었던 끔찍한 일들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듯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동시에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위트있게 전하고 있다.


충분히 증오하고 원한을 가질 만한 일임에도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가 바라는 정의가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러니 그에게 '독일인들을 용서했는가'는 오히려 지나치게 감상적인 질문처럼 보인다. 차라리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가 적절한 질문일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인간 정신이 끝내 파괴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바로 그것, 뭔가를 증오하고 원망하면서 인간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일에 자신의 정신 어느 한 조각도 내어주지 않았다. 인간의 증오와 원망, 미움과 배제가 낳은 괴물 같은 곳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을 그는 끝내 다시 토해내지 않고 삼켰다. 거기서 느낀 감정들을 토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누군가는 자신이 겪은 고통이 진심으로 다른 인간들에게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놀랍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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