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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10. 2020

"그대 두 손을 놓쳐서 난 길을 잃었죠"

그대 두 손을 놓쳐서
난 길을 잃었죠
허나 멈출 수가 없어요
이게 내 사랑인걸요

-이소라,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이 곡이 수록된 장면을 기억한다. 서로 눈부시게 사랑했던 남녀는 이제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증오마저도 지나서 이제는 무관심해져버렸다. 햇살 좋은 어느 주말, 여자는 오랜만에 남자에게 파스타를 만들어 먹자고 하고 남자는 마지못해 승낙한다. 두 사람은 장을 본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하나도 즐거워보이지 않는다. 함께 물건을 고르지도, 서로를 바라보지도, 웃지도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장본 것을 들고 나란히 걷지도 않는다. 뒤따라 걷던 여자는 몇 걸음 앞서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얼른 뛰어가서 그의 팔짱을 낀다. 그들이 겨우, 연인인채로 집으로 돌아와서 겨우, 파스타는 완성되고 두 사람은 겨우, 마주 앉아 파스타를 먹는다.


카메라는 멀리서 두 사람을 비춘다. 이소라의 노래가 흐른다. 그들은 좁은 식탁에 마주 앉아 있지만 너무나 멀리 있다. 노래는 절정으로 치닫고, 여자는 조용히 흐느낀다. 남자는 그 흐느낌을 듣지만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들이킨다.



"그대 두 손을 놓쳐서

난 길을 잃었죠

허나 멈출 수가 없어요

이게 내 사랑인걸요"




'헤어지는 용기'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상대방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을 알게 됐을 때, 더 이상 그의 괴이한 습관이 귀엽지 않고, 그의 밥 먹는 모습이 예쁘지 않고, 그의 걸어가는 뒤꼭지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 우리는 이별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언제든 헤어질 수 있음'을 상기해봐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우리는 서로를 미친 듯이 사랑했었고, 행복했었고, 미래를 약속했었다. 마치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인것처럼 꼭 닮았었던 그때 그 시간. 그 모든 '과거형'의 문장들이 그에게서 멀어져버린 내 마음을 변명한다. '저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야. 내 사랑은 변함 없어.'


<멜로가 체질> 초반부, 앞서 말한 그 '파스타 연인'은 여자 쪽이 혼자 잘못하는 경우 같았다. 자주 과음을 하고, 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고, 외박을 하고, 남자친구를 의심하는 여자. 하지만 저 파스타를 먹는 장면에 이르러 우리 모두는 알게 된다. 두 사람 사이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너를 위하는 척 하는 위선에 있었음을. 헤어지는 용기를 내지 않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드라마 후반부에 이르면 남자는 깨닫는다. 그녀의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기대에 맞추려 했음을,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녀를 미워했음을, 사랑한다는 거짓말로 그녀를 단죄했음을. 그는 그녀가 밉다는 이유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었다. 그녀가 미운 짓을 하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라고 스스로에게 강변했다. 그는 온몸으로 얘기했던 거다. "너가 이런 애인데, 내가 널 어떻게 사랑하겠어?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 건 다 너 때문이야."




파스타 연인은 완전히 이별한 후, 우연히 재회한다. 드라마는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됐는지, 울며불며 과거를 헤집고 뜨거운 밤을 보내고, 그리고 전처럼 다시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또 질려버리게 됐는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차분해진 그녀의 얼굴에서, "시간 괜찮으면"이라고 그녀의 의중을 묻는 남자의 행동에서 그 둘이 조금은 성장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둘은 밥이나 한 끼 먹고 헤어졌을 것이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던 그 시간을 소중한 추억으로 남긴 채, 이제는 부디, 좀 더 성숙한 사랑을 하러 서로를 떠나길, 나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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