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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17. 2020

"그 사랑을 '먹튀'하지 않겠어요."


스무 살에 서른 살을 떠올리면 정말 그런 나이가 오긴 올까 하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서른이라니. 어쩌다 학회 뒤풀이 자리에 지나가다 들렀다며 양복을 입고 찾아오는 선배들을 보면서 서른이란 저런 걸까, 서른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오늘 술값은 누구누구 선배가 계산했다고 전하는 나보다 한 두 살 위의 선배는 마치 자기가 계산한 것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조금은 으스대는 얼굴. 누군가에게 저런 호의를 베풀 수도 있는 게 서른인가 하는 생각. 그러게. 대학생 때는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선배를 보면 까마득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될 만큼 어른 같이 느껴졌었다.


그런데 막상 서른이 돼보니(그 서른도 한참 전 일이지만) 서른도 그냥 애였다. 나이를 먹는다고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지는 건 정비례 그래프가 아니니까. 취업 후에도 가끔 학회 뒤풀이에 들러 후배들 술값을 계산하는 일? 그건 보통 정성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배들이 보여준 사랑과 애정을 새삼 깨닫는 날들.


한 번은 졸업한 선배의 결혼식에 재학생들까지 우르르 몰려 가서 축하 인사를 건네고 밥을 얻어 먹고 단체 사진에 얼굴을 올린 적이 있다. 식이 모두 끝나고 그 선배가 멀리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며(신촌에서 홍대입구역이 뭐가 먼가요.) 재학생 축하사절(?)의 대표격 되는 이에게 그냥 흩어지지 말고 개골목에 가서 찌개에 소주라도 한 잔씩 하고 들어가라고 봉투를 주는 걸 봤다. 그렇게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있던 개골목으로 돌아와서 마신 소주의 맛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가 당연한듯 모여 마시던 술 한 잔이, 나누던 대화 하나 하나가 누군가의 애정으로 만들어진다는 걸 직접 목격해서였겠다. 그 언니는 우리의 이름도 학번도 잘 모를텐데, 우리도 그 언니를 그저 소문으로 알 뿐 마주 앉아 밥 한끼 먹어보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면 그냥 '모르는' 사람 결혼식에 가서 밥 얻어 먹고 술까지 얻어 마신 격이다. (쓰다 보니 나 되게 옛날 사람인 거 인증 중?)


나이를 먹는 건, 어쩌면 그때는 몰랐던 누군가의 친절과 애정을 다시금 꺼내 보는 날이 많아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누군가의 나이가 되어보는 일.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누군가의 사랑 속에 살아가는 것이라는 마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늘 그 사랑에 빚지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


그러니 그게 꼭 내 결혼식에 찾아온 잘 알지 못하는 후배에게 밥과 술을 먹이는 일은 아닐지라도, 개골목에 찾아가 술값을 지불하는 일은 아닐지라도(요즘도 후배들이 개골목에 다니는지 모르겠다. 아, 거기가 여전히 '개골목'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받은 이 사랑을, 그저 '먹튀'하지는 않겠노라고, 나지막하게 말해본다. 나는 이제 내 사랑을 필요로할 누군가에게 이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지.  






덧, 그리고 언제나 사랑을 가득 담아, 나는 그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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