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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24. 2020

깨진 그대로 와서 편하게 있어요

사랑, 사랑하는 일,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언제나 생각한다. 나는 내가 사랑이라는 단어와 한 몸처럼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사랑지상주의자'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언제든 기꺼이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다. 꼭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의 어떤 말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함께 듣는 이야기를 사랑하고, 계절이 변하는 시기의 공기를 사랑하고, 내 책상 위에 놓인 커피나무 화분을 사랑한다.  


그러다가 문득 대체 어떤 게 사랑하는 일일까 생각하게 됐다. 언제나 사랑사랑 노래를 하면서 정작 내가 하는 사랑이란 게 정말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니,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것까지도 되돌아보게 됐다. 사랑한다는 말, 사랑해서 다행이라는 말, 사랑이라면 괜찮다는 말. 우리는 평생을 사랑받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외롭고 쓸쓸한걸까. 사랑이 뭐길래 사람을 이토록 좌지우지 하는 걸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은 "깨진 그대로 와요"와 "편하게 있어요"가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에 대해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과 상대의 욕망을 존중하겠다는 것 두 가지. 사람은 워낙 불완전하고, 삶도 유한하니, 사실 그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일은 애초에 쓸쓸함과 짝을 이루는 일이다. 그 쓸쓸함을 우선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와 내가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고, 상대와 내가 완벽한 존재도 아니라는 것.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란 우리가 그런 존재임을 눈치챘다는 섬세한 표현 아닐까. 


그렇다. 그토록 사랑했던, 오랜 시간을 같이했던 당신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흘러간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얽힌 진정한 슬픔과 아름다움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한때 서로의 곁에 머물다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너그럽고 관대하게 서로를 지켜봐줄 수 있었나보다.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한겨레출판)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께"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억지로 그러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저 말이 공중에 붕 뜬 말 같이 느껴진다. 남편이 결혼 초에 저 말을 했을 때 나는 꼭 "어떻게?"라고 되물어서 산통을 깨곤 했다. 내 질문이 이상한가? 간단한 샐러드를 한 접시 만들려고 해도 '어떻게'가 중요한데, 사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인데 당연히 '어떻게'가 중요하지 않겠나. 안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설마, 혹시, '내 존재만으로도 당신은 행복할거야' 같은 류의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말이었나. 이쯤되면 남편은 서운한 얼굴이 되곤 했다. 강신주는 말했다. "사람은 사람에게 존재 자체로 민폐"라고. "그걸 잊지 않는 게 겸손이고 그걸 잊는 게 오만"이라고. (강신주,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한국교육방송공사) 


나는 내가 최선을 다해 뭔가를 이뤘을 때, 내가 능동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을 때 행복하다. 그러니 타인이 나의 깊은 속마음을 건드려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물론 상대가 나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겠지. 나를 웃겨줄 때도 있고 눈물이 찔끔나게 감동을 줄 때도 있겠지만, 감히 말하건데 나는 개개인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보듬어줄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나는 또 내가 스스로 서 있다고 느낄 때, 내 감정의 촉수가 낱낱이 살아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하다. 그리고 그건 대체로 어떤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가능하다. 내가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순전히 상대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이 개별성이 서로를 사랑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은 사소한 것에도 감동하는 거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너가 이만큼 나를 알아봐주는 게, 이만큼 나를 기억해주는 게 소중한거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당연히 나를 이해하고 보듬어주길 기대하는 게 아니라,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상대의 마음과 노력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아껴주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믿는다. 또 한 가지, 상대의 비정상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이나 행위까지 그저 깨진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나의 안전과 행복이 보장된 상태에서 상대의 단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요즘 가장 자주 갖는 마음은, "당신의 마음이 편한 대로." 이다. 나에게 전화를 걸지 말지, 나를 보러 올지 말지, 지금 그 일을 할 지 말 지, 앞으로 뭘 할 지 말 지. 삶에 달린 많은 선택에서 부디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선택을 하는 것. 그리고 내가 대단한 건 해줄 수 없지만, 당신의 마음이 내킬 때 내키는 일을 하기를, 그래서 스스로 행복하기를 언제나 바라는 것. 말 그대로 깨진 그대로 와서 편히 있으라는 것. 나 역시도 지금 이 자리에 깨진 그대로 편히 있겠다는 것. 


모두가 열심히 사랑했으면 좋겠다. 나를, 상대를, 그리고 사랑하는 어떤 것들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눈치 보지 말고, 주눅들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 끝에 뭐가 있을지 염려 하지도 말고 사랑했으면 좋겠다. 사랑은 준만큼 돌려 받아야 완성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순간 순간 완성되는 것’임을 의심하지 말고 사랑했으면 좋겠다. "사랑 밖엔 난 몰라." 라고 흥얼거리면서, 백만송이 꽃을 피워 자기 별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심수봉의 노래, “백만송이 장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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