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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08. 2020

무해한 존재에 대하여

(드라마와 소설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사한 얼굴의 이 아이는 지금 '옴벌레'를 삼키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된 <보건교사 안은영>(원작,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민음사, 2015)속 백혜민(송희준)은 엄마도 아빠도, 출생도 없이 그저 '나타난다.' 옴벌레가 출몰해 사람들을 괴롭히면 이 아이가 나타나 그것들을 '삼킨다.' 이 아이의 위액만이 옴벌레를 완전히 소화시킬 수 있다. 아이의 소화력은 어마어마한데, 한 가지 유의사항이 있다면 절대 빈 속에 옴벌레를 먹지 말 것. 빈 속에 먹으면 위가 쓰리거든요!


혜민이는 자신의 담당 구역에서 수백년을 존재해왔다. 옴벌레는 때때로 창궐해서 사람들을 재수 옴 붙게 하니까. "옴 붙으면 100일 안에 떼내야 해요. 오래 두면 혼이 상합니다." 이 아이는 당연하다는듯 입 안 가득 옴벌레를 잡아 넣고 우물거린다. 스무살이 되면 사라지고, 자신의 구역(반경 5.38km)밖으로는 절대 나가서는 안되는 삶에 순응한다. 안은영(정유미)은 묻는다. "원래 그런 게 어딨어?" 혜민이는 대답한다. "원래 그런거죠 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걸 모른다.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아서 백혜민의 수명은 그대로 짧다는 얘기였다. 은영은 스무 살에 끝나 버리는 인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옴잡이가 아닌 보통 사람도 때 이른 죽음이야 종종 맞이하지만, 그걸 반복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역시 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구해 주러, 잘 버텼다고 칭찬해 주러 오지 않는다. 그날 저녁 은영은 혜민과 패스트푸드를 먹기로 했다.*


그 말간 얼굴을 보며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옴잡이의 삶을 포기하고 스무살 이후에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안은영에게 혜민이는 묻는다. "그럼 학교는요? 이 애들은 어떡해요?" 화가 치미는 안은영이었지만, 그 무해한 존재의 무해한 마음 앞에 안은영도 무릎을 꿇는다. 학교와 그 주변에 득실대는 옴벌레를 밤새도록 잡아다 주며 말한다. "이제 됐지? 학교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께."




살다보면 그런 이들을 만나곤 한다. 마치 세상에 발 딛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세상을 굴러가게 한다고 큰소리치는 논리와는 빗겨 서 있는, 무해한 사람들. 드라마를 보며 어쩌면 그 사람들은 옴을 잡기 위해 태어나 이런 저런 얼굴로 살아가는 수많은 '혜민'이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보았다.


그 무해한 얼굴들이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게 분명한데, 그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소리 없이 나타나서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내밀고, 웃음을 주고,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다. 나를 기억해달라고 치대기보다는 차라리 한 마리 옴을 더 삼키려고 하는 이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 당신이 만났던 혜민이는 누구의 얼굴이었나. 설마, 혜민이를 잊은 건, 아니겠지.




(혜민은 은영의 도움으로 위를 절제한 후 옴잡이로서의 삶을 끝내고 평범한 사람이 된다.) 여담이지만 졸업 후에도 자주 연락해 오던 혜민이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역사가 유구한 해충퇴치방제 회사에 입사했다고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찾아왔을 때 두 교사는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좋은 회사라는 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왜 또, 대체 왜 굳이.

두 사람의 당황해하는 얼굴을 보며 혜민이 붉은 입술로 웃었다.*


이래서 사람 고쳐쓰는 거 아니라고들 하나보다. 혜민이를 상상하며 애틋한 미소를 짓는다.


*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민음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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